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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풍명월(淸風明月)의 관문 청풍대교
영주에서 1박을 하고 제천 청풍으로 가는 길에 “단양팔경 휴게소”에서 잠시 쉬었다 간다. 청풍명월이 제천 청풍을 지칭하는 고유명사가 아니다. 사전에서는 “맑은 바람과 밝은 달”이라고 설명하고 있으니 청풍명월은 도처에 있을 것이다.
그러함에도 “청풍명월”에는 믿거나 말거나 같은 이런 이야기가 있다.
조선조 성종(成宗, 제9대 왕) 때 몰락한 선비 유청풍과 박명월이 있었는데, 유청풍은 “청풍정”을 지었고 박명월은 “명월정”을 지어서 이 정자에서 해학적인 풍자극을 벌여 백성들 가슴속을 시원하게 해줬다고 하며 이같이 해학과 풍자를 하는 사람을 “청풍명월인”이라 부른데서 청풍명월이 유래되었다고 한다.
청풍문화재단지의 관문 팔영루(八詠樓)
팔영루는 성문 위에 있는 누각으로 이 문을 들어서면 청풍문화재단지가 펼쳐지며, 고종 때의 청풍부사 민치상(閔致庠, 1825∼1888)의 팔영시(八詠詩)에서 청풍팔경(淸風八景) 이야기가 나온다.
민치상은 팔영시에서 청풍호의 조는 백로(淸湖眠鷺, 청호면로), 미도에 내리는 기러기(尾島落雁, 미도낙안), 청풍강에 흐르는 물(巴江流水, 파강유수), 금병산 단풍(錦屛丹楓, 금병단풍), 북진의 저녁연기(北津暮煙, 북진모연), 무림사 종소리(霧林鐘聲, 무림종성), 한밤 목동의 피리소리(中夜牧笛, 중야목적), 비봉의 해지는 모습(飛鳳落照, 비봉낙조)을 읊어 청풍팔경이 만들어졌다고 한다.
그런데 시(詩)라는 게 지극히 주관적인 감정이어서 촌철살인 같은 시도 있는가 하면 자기 혼자만의 언어의 유희인 나 홀로 문학도 많은 것 같다. 이 얘기는 공연예술가 백남준(白南準, 1932∼2006)씨의 “예술은 사기다.”와 “나 홀로 예술”을 인용한 얘기인데, 요즈음 사람 서넛이 모이면 그 중에 한 사람 이상은 작가라는 말도 있다. 시인과 사진작가가 많은 것 같은데 머잖아 전 국민의 작가시대가 열릴지도 모르겠다.
석조여래입상 – 보물 제546호
시답지 않은 설명 보다는 설명문을 보는 게 좋을 듯하다.
금병헌(錦屛軒) & 청풍관 - 충청북도 유형문화재 제34호
이 건물도 청풍면 대부분이 수몰되던 독재 비슷한 권위주의 정부 시절에 옮겨지면서 부사인지 사또인지가 형틀을 내려다보고 있는 모습을 연출했는데, 말 잘 들어야지 그러지 않으면 이 꼴 난다는 메시지 같다. 그러든 저러든 청풍부사 자리가 평양감사만은 못해도 서로 가려고 경쟁이 치열했던 자리였다고 한다.
지금도 도처에서 겁을 주고 있다.
“절대금지, ㅇㅇ이하의 징역이나 과태료(벌금)...”
세계적으로 가장 많이 읽혔던 책 중 하나는 죄와 응징보다 사랑과 천국을 더 많이 얘기하기 때문에 호소력이 더 크고 더 많은 독자를 끈다는 얘기도 있는 걸 보면 채찍보다 당근이라는 얘기 같다.
금남루(錦南樓, 충북 유형문화재 제20호) & 한벽루(寒碧樓)
금남루는 청풍부의 외삼문으로 조선 순조 때(1825년) 창건되어 중앙문은 부사의 출입문이고 나머지 사람들은 좌우의 문으로 출입했다고 한다. 1985년에 지금의 위치로 이전되었다고 하며, 한때는 청풍초등학교의 교문이었다고 한다.
망월산성(望月山城) & 망월루(望月樓)와 관수정(觀水亭)
망월산성은 해발 373m인 망월산에 둘레가 495m의 작은 산성으로 한때는 사열이산성(沙熱伊山城)이라고도 불렸던 것 같은데, 사열이산성을 늘려 쌓았다는 기록이 있으며 고구려가 지배했던 시절 당시 지명이 사열이현(沙熱伊縣)이라서 그렇다고 한다.
산성으로 올라가는 길에 관수정이 있고 산성의 정상에는 망월루가 있는데, 내 눈에는 정자로 보이는데 “망월루”라 표시되어있다. 우리나라 누정(樓亭)의 호칭은 정(亭), 누(樓), 대(臺), 각(閣) 등 다양하며 구분하기가 매우 애매한데, 숫자가 많은 정자와 누각을 기준으로 보면 정자는 대개 사적공간이며 팔각형이 많은 반면에 누각은 대중적 개방적 공간으로 정자보다 큰 사각형이 많은 것 같다.
어쨌든 망월산성의 망월루에서 바라보는 청풍호반과 주변의 산들은 그야말로 청풍명월이다. 그런데 갑자기 헬기가 떠서 연거푸 왔다 갔다 한다. 아마도 어디선가 산불이 난 거다.
망월루의 전망
망월루에서는 청풍부의 관아는 물론이고 청풍호반과 청풍문화재단지가 모두 다 한눈에 들어온다. 그래서 청풍명월인가 보다. 벚나무는 죽을 고생을 하며 s자 모양이 되어 살아남았는데 이걸 s라인 벚나무라고 하니 제 눈에 안경인 거다.
수몰역사관 & 제천 유물전시관
지금까지는 아름다운 것들을 보았는데, 이런 아름다움에 묻힌 가슴 아픈 이야기들을 볼 차례다.
충주댐(충주호)은 우리나라 최대의 담수호로 1980년에 착공하여 1986년에 완공했으며 수자원 확보와 홍수조절 및 전력생산 등 다목적 댐이다. 이런 담수호를 만들기 위해 청풍면 대부분이 수몰되었고 그로 인해 49,627명이 정든 집을 버리고 낯선 곳으로 이주해야만 했으니 고향을 잃은 상실감의 트라우마도 있을 것 같은데 세월이 가면 잊어질까...
그 당시 30대 이상의 성인들은 대부분 무지개다리를 건넜을 것 같고 10 살배기 아이들도 50대가 되었을 텐데.....
청풍나루
각시는 유람선을 타보지 않은 것 같아서 유람선을 타려고 내려갔더니 타임아웃이란다. 따뜻한 날에 다시 오자고 했다.
이렇게 가을이 흘러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