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청도

서산 해미읍성

아미고 Amigo 2024. 4. 17. 23:16

(2024. 3.13)

(사진은 클릭하면 커집니다.)

 

 

해미읍성 진남문

해미(海美)라는 지명은 1407(태종7)에 정해현과 여미현이 합쳐지면서 두 현에서 한 자씩을 따온 것이라며, 해미읍성(海美邑城)은 서해안고속도로를 타는 남행길에 그리고 남당리로 새조개를 먹으러 다니는 길과 안면도 다니는 길에도 심심치 않게 들렀는데 블로그에는 이제야 올리니 많이 미안하다. 해미읍성은 해미IC 가까이에 있어서 잠간씩 들러보기 좋은 곳이다.

 

해미읍성은 1417(태종 17)에 시작하여 1421(세종 3)에 완공했다고 하고, 진남문을 들어가서 뒤돌아보면 황명 홍치 4년 신해 조라는 글이 보이는데, 이것은 명나라 효종의 연호인 명치4, 1491년에 증수 완공되었다는 얘기 같다.

 

 

 

 

 

회화나무

중국이 원산지라는 회화나무를 한자로는 괴목(槐木)이라 하고 영어로는 scholar tree라고 하는 게 우습다. 나무와 화초에 의미를 부여하고 등급을 매기는 인간도 인간의 특권이자 굴레를 벗어나지 못하는 것이 당연지사겠지만 말이다.

 

하여간 해미읍성의 회화나무는 조선후기에 100년 정도의 천주교박해(신해, 신유, 기해, 병오, 병인박해)”로 인해 의미심장한 유명수(有名樹)가 되어버렸는데, 이는 가야산에 있는 대원군의 아버지인 남연군(南延君, 17881836)의 묘가 도굴된 것이 기폭제가 되어 1,000여명의 천주교도가 이곳에서 처형되었으며 회화나무도 처형의 도구로 이용되었다는 것인데 지금으로 환산하면 대략 3,000명쯤 될 것 같다.

 

재미있는 얘기는 당시에 회화나무에서 교수형을 했던 철사 줄의 흔적이 지금도 남아있다는 자료의 설명이 1968년의 “1.21 김신조 사건을 쇼윈도우화 하는 북한산의 소나무가 맞은 총탄 흔적을 연상하게 하여 웃음이 나온다. 나무도 생명이 있고 생장(生長)하며 변화한다.

 

 

 

 

 

옥사(獄舍)

천주교박해로 해미읍성에서 1,000여명을 처형하자니 이 옥사는 조용할 날이 없었을 텐데, 왜 그렇게 많은 사람들을 처형했을까? 시계를 뒤로 돌려보면, 당시는 삼강오륜, 군사부일체, 장유유서, 여필종부, 삼종지도 등이 가치규범으로 온존하던 때인데, 이런 고유의 가치를 완전히 부정하는 외계인 같은 이상한 사람들이 나타났는데 이를 어찌 할꼬.....

 

공화정과 종교의 자유에 길들여진 우리에게는 이상한 일일수도 있지만, 왕의 나라이자 왕에게 기대어 사는 관료들에게는 하늘이 무너지는 괴변이었을 수도 있었을 것이다. 다산 정약용도 천주교에 연루되어 이곳에 유배되었다가 정조(조선 22대 왕, 17521800)의 배려로 풀려났다고 하며, 사람을 처형하는 데에도 사약과 교수형 그리고 참수형이 있었는데, 동양과 서양은 선호도가 달랐으며 참수를 하는 망나니에게 뒷돈을 주었다는 것에 이르면 막막해진다.

 

옥사의 탱자나무는 원래 해미읍성의 방어를 위해 성곽 둘레에 탱자나무를 심었기에 일명 탱자성이라고 했던 것을 웅변하고 있는 것 같다.

 

 

 

 

 

민속가옥

고창읍성, 낙안읍성과 더불어 현존하는 조선시대 읍성의 하나임에는 분명한 것 같은데, 읍성 내에 민가가 있었는지 여부는 불분명하고 이런 볼거리로의 복원이 의미 있고 조화로운 것인지 모르겠다.

 

 

 

 

 

동문 잠양루

지금도 정문인 남문 진남문 앞이 번화가지만 동문 잠양루(岑陽樓) 앞도 제법 시원한 공간으로 변했다. 해미읍성은 읍성으로서의 의미보다 천주교와 관련된 읍성의 이미지가 더 크게 부각되어 있는 것 같으며, 도시국가였던 유럽의 성주 중심의 성과 지역공동체 정신이 발현된 우리의 읍성을 비교해보는 것도 재미있을 것 같다.

 

 

 

 

 

호서좌영과 동헌

서산(瑞山)이라는 지명은 1284(고려 충렬왕 10)에 만들어졌다고 하며, 1621(조선 효종)에 호서좌영(湖西左營)이 설치되었다고 하니 호서우영도 있을법한데 호서우영은 없다. 성안의 작은 성인 호서좌영에 대하여는 현장에도 그리고 사전자료에도 이렇다 할 설명이 없다. 그저 준동하는 왜구 등을 제압하기 위해 설치한 병영 정도로 이해되며, 호서(湖西)와 호남(湖南)의 기준인 호()가 제천의 의림지와 금강으로 오락가락 하고, 영남(嶺南)과 영서(嶺西) 그리고 영동(嶺東)의 기준인 영()도 조령(鳥嶺)과 태백산맥으로 나뉜다.

 

호서좌영에는 동헌(東軒)이 있으며 병마절도사와 현감겸영장의 집무실이었다니 행정과 군사를 겸한 곳이었고, 세계 해전사의 영웅 이순신 장군도 무관 초기에 잠시 이곳에서 근무했었다고 한다.

 

 

 

 

 

객사와 내아

해미읍성에서 가장 아름다운 풍경의 하나가 바로 객사 앞에 있는 두 그루의 소나무다. 원래 있었던 것 같지는 않고 어느 때인가 심었을 것 같은데, 매란국죽의 사군자보다 훨씬 기품 있고 아름답다. 내아(內衙)는 해미읍성의 관속들이 그리고 객사(客舍)는 해미읍성을 찾은 객()들이 머물렀던 곳이다.

 

 

 

 

 

해미읍성의 풍경

호서좌영 앞에 있는 회화나무에서 남문을 바라보는 풍경 그리고 동문에서 호서좌영과 민속가옥을 바라보는 풍경이다.

 

 

 

 

 

서문 지성루(枳城樓)

서문의 누각 지성루의 지() 자가 탱자나무 지인 것은 해미읍성이 탱자나무 울타리를 가졌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서문으로 나가면 사형을 집행했던 곳이 나온다는데 문도 잠겨있을 뿐만 아니라 북문인 암문에서 살펴보기로 했다.

 

 

 

청허정(淸虛亭)

나지막한 능선에 있는 정자여서 전망이 탁 트여 산이 있는 북쪽을 제외하고는 해미읍을 한눈에 조망할 수 있다.

 

 

 

 

 

 

북문 암문(暗門)

문루를 세우지 않은 비밀의 문으로, 주로 외부로부터 인력과 물자를 조달하는 통로로 쓰였겠지만 형세가 어려울 때는 도주로로도 쓰였을 것 같다. 암문 위 성곽에서 바라본 북쪽의 풍경과 청허정의 모습이다.

 

 

 

 

 

 

 

이 해미읍성에서 수많은 일들이 있었겠지만 우리에게는 천주교박해사건이 두드러지게 알려져 그런 곳으로 자리매김 되는 게 씁쓸하기도 하다.

전제왕정의 신분제 사회에서 God 앞에서의 자유와 평등 그리고 사랑이라는 말은 무척 달콤했을 것이다. 그러나 역사를 되돌아보면, 정치권력과 종교권력 중 어느 것이 더 많은 사람을 죽였는지는 역사가 말하고 있지 않은가또한 민속신앙과 힌두신앙 같은 다신문화는 다양성이 존중되어 별 문제가 없지만 일신교문화는 우리가 경험했던 것들을 음미해볼 필요가 있을 것 같다.

모처럼의 남행길에 잠시 쉬어가는 곳으로 해미읍성을 둘러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