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기도

다산 정약용 생가 & 유적지

아미고 Amigo 2021. 2. 18. 09:01

(2021.2.6)

 

 

다산문화관 & 출입문(실학연수)

다산 정약용(茶山 丁若鏞, 1762∼1836) 선생은 참으로 존경스럽고 놀라운 분으로 조선의 보배이면서도 한편으로는 난해한 분이라는 생각도 든다.

 

 

 

 

 

 

 

 

 

다산기념관 & 사당(문도사)

다산은 남인 가문 출신으로 정조(正祖)의 총애를 받았다고 기록되어 있는데, 이 대목에서부터 난해해진다.

 

그의 생애 74년 중에서 약관(弱冠)을 갓 넘어 21살에 진사시에 합격을 했으니 21년을 빼면 53년 정도의 사회생활을 한 셈인데, 정조의 적극적인 지지를 받으며 관직 생활을 했던 것은 불과 10년 정도에 불과하고 36년 동안을 유배와 은거로 야인생활을 했다는 게 난해하다.

 

 

 

 

 

 

 

 

 

다산 묘역

다산은 당시에 서학(西學)이라고 했던 서양의 문물 중 천주교에 형제자매들이 연루되는 바람에 한꺼번에 고난의 길을 가게 되는 것이 불행과 행복의 서막이었다.

 

당시에 정권을 장악하고 있던 노론들이 존중하는 성리학에 반해서 천주학(천주교)은 충효사상에 기반한 군사부일체의 혈연과 군신관계의 인륜을 부정한다 하여 1801년에 천주교도와 남인들을 처형하고 유배한 사건인 신유사옥(辛酉邪獄 또는 신유교난 辛酉敎難)에 휩쓸려 포항 장기로 유배되었다가 다시 강진으로 유배되어 18년을 보낸다.

 

다산이 살았던 조안 능내리 마을은 양수리 두물머리에서 만난 북한강과 남한강이 한강이 되어 마을 앞을 유유히 흘렀을 텐데 팔당호가 건설되면서 마을이 수몰되어버렸으니 다산의 묘도 원래 묘인지 이장을 한 것인지 궁금한데, 수몰의 이유뿐만 아니라 전통적인 묘자리와는 다른 특별한 위치 때문에 그런 궁금증이 더하다.

 

이 대목에서“목민심서(牧民心書)” 얘기를 꺼내는 게 좋을 듯싶다.

베트남의 구국의 영웅 호치민이 다산의 목민심서를 읽으며 베트남통일을 이루어냈다는 얘기가 있는데 충분히 가능한 얘기라 생각된다. 왜냐하면 안남산맥 동쪽의 베트남까지는 한자 문화권이어서 한자의 독해가 가능했기 때문이다.

 

 

 

 

 

 

 

 

 

여유당(與猶堂)

“여유당”은 노자의 도덕경에 나오는 말로 “코끼리가 살얼음판 위를 걷듯이 조심한다.”는 뜻이라는데, 신유사옥 등에 시달리며 살아온 다산의 심경은 충분히 이해되지만, 다산의 후손이라며 권세를 휘두르던 정일권 (전) 국회의장의 휘호가 당호석으로 서 있는 건 느낌이 좀 그랬다.

 

1818년 57세 되던 해에 유배에서 풀려나 생을 마감하는 1836년까지 또다시 18년을 이곳 여유당에 은거하면서 사색과 저술 활동에 몰입하였는데, 마을 앞을 흐르던 한강 물을 바라보며 많은 대화를 했을 것 같다.

 

동작동 국립현충원은 종종 다녔던 곳이지만, 몇 해 전에 높은 곳에 계시는 두 분께 자녀들에 대한 밥상머리 교육이 잘못된 건가요 아니면 묘자리가 별로인가요 하고 물었더니 대답이 없으시더라.

 

 

 

 

 

 

 

 

거중기

수원성 건축에 사용되었던 거중기라는데, 다산은 수원성을 설계하였고 한강에 배다리(舟橋)도 구현하였으며 활차녹로 등 서양의 기술을 활용한 많은 기자재 등을 개발했다.

 

 

 

 

 

 

 

 

 

다산기념관과 생가 입구

위 사진은 입구에 있는 박철우 작가의“꺼지지 않는 불”이라는 조각으로 다산이 저술한 500여 권의 책이 꺼지지 않는 불꽃으로 실학사상의 정신을 불태우는 모습을 형상화한 것이고 아래 사진은 출입문(실학연수)에서 입구 쪽을 바라본 모습이다.

 

참으로 아이러니다.

만약에 다산이 유배와 은거 생활을 하지 않고 조정의 부름을 받아 평탄한 관직 생활을 했더라면 “목민심서”를 비롯한 주옥같은 저서들이 나올 수 있었을까? 고난과 역경은 더러는 인간의 영혼을 숭고하게 승화시키기도 하는 것 같다.

 

다산은 버림받은 자신과 세월을 포기하지 않고 독서와 사색 그리고 연구와 저술에 매진하여 주옥같은 저서는 물론 방대한 역작들을 남겼으니 정인보(鄭寅普, 1893∼1950) 선생이 다산을 “조선의 유일한 정법가(政法家)”라 했던 것 아닐까!

 

 

 

 

 

 

 

 

 

천일각(天一閣)

다산이 강진의 초당(草堂)에 유배 중일 때 가까이에 있는 만덕산(萬德山) 아래의 백련사(白蓮寺)에 있었던 초의선사(艸衣禪師)가 서로 오고 가는 산길에 천일각이 있는데, 아래의 사진이 강진에 있는 천일각이고 위의 것은 조안 능내리에 재현한 것이다.

 

다산초당은 여러 번 다녔던 곳이고 백련사에는 학창 시절에 나와 한 방에서 1년여를 함께 생활했던 친구가 주지 스님으로 있는데, 승가대학교 교수를 거쳐 대학원장을 끝으로 학교를 떠나 본인이 계를 받았던 무위사가 가까운 백련사에 있으니 세상은 돌고 도는 거 같다.

 

 

 

 

 

 

 

 

 

고목 & 팔당호

시간은 속절없이 흘러가고 아늑했던 마을은 팔당호에 수몰되었고 삭아가고 있는 고목만이 세월의 무상을 말하고 있다.

 

다산은 억울하고 울컥울컥 화도 나고 왕과 조정이 원망스럽기도 했을 텐데 자포자기하지 않고 학문에 정진하여 방대한 저술을 남겨 세상에 횃불을 불태웠으니, 궁형을 당하고도 중국의 약 3000년 동안의 영웅호걸들의 삶을 통해 사기(史記)를 기록했던 사마천(司馬遷, BC145경∼BC85경)과 비교가 안 되는 위대한 학자였다.

 

다만, 사마천은 그렇게 긴 세월 동안의 방대한 영웅호걸들의 행적을 통해 세상의 일정한 법칙이나 규칙성을 찾아보려 했던 것 같은데, 종국에는 세상에 “인과응보”는 없다는 고백이 그동안 철학이 진리와 인식론으로 허송세월을 하고 지금에 와서 세상에 진리란 애당초 없는 것이고 모두 우연의 소산일 뿐이라는 고백과 맞물려 허탈해진다.

 

그래도 한강은 유유히 흐르고 있고 다산 선생은 한강을 굽어보고 있다.

 

 

 

하지만 다산 선생께는 “인과응보”가 작동된 거 같다.

죽음에는 두 가지가 있는데, 하나는 심장이 멎는 생물학적 죽음이고

다른 또 하나는 세상에서 잊히는 사회적 죽음이라는데, 선생은 영면하고 있지만 낭랑한 목소리로 우리를 가르치고 있으니 왕성한 사회활동을 하고 있고 또 앞으로도 하실 것이니 우리 곁에 살아계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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