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 주변

김포 장릉(金浦 章陵)

아미고 Amigo 2020. 10. 11. 20:23

장릉

 

인조(조선 제 16대왕)의 부모인 원종과 인헌왕후 구씨(氏)가 추존(追尊)된 능이니 예나 지금이나 부모찬스와 자식찬스는 공존하며, 자본주의건 사회주의건 부익부 빈익빈의 세상이고 그런 역사와 삶의 이끼가 낀 곳이다.

 

 

장릉도 세월따라 부침을 하였고, 모든 지역이 프리-존 이었다가  점진적 통제가 더해진 곳으로 문명화 개발 도시화와 맞물려 우리에게 숙제를 던지는 것 중의 하나이다. 문명화 도시화 개발은 과연 좋은 것이며 우리는 그것을 얻기 위해 무엇을 희생하고 있는 것일까?

 

우리 나라에는 모두 42기의 조선왕릉이 있는데, 북한 개성에 있는 제릉과 후릉을 제외한 40기를 2008년 유네스코 세계 문화유산으로 등재 신청하여 다음 해인 2009년에 “조선왕릉 세계유산”으로 등재되었는데, 유홍준 문화재청장의 열정의 결과이고 세계적으로 유례가 없는 것이라 한다.

 

유홍준 교수는 내게 스승이시다. 나는 그의 대면 강의를 한 번도 들은 적이 없지만 그의 저서 “나의 문화유산 답사기”를 통해 문화유산을 공부하기 시작하여 많은 답사를 다니면서 견문을 넓혀왔기 때문이다. 그뿐만이 아니라 문화재에 대해 관심이나 개념도 없던 시절에 문화재의 소중함은 물론 그걸 보는 방법과 재미를 가르쳐주셨으니 얼마나 고마운가.

 

세계유산은 문화유산, 자연유산 그리고 복합유산으로 구분되며, 우리 나라의 종묘사직과 궁궐 그리고 능(陵)에 대하여는 내 블로그 “경희궁과 궁궐(2019.12.21.)” 및 “종묘(2020.5.4.)” 그리고 “환구단-원구단(2020.6.27.)”에서 개략하였으므로 생략한다.

 

 

 

 

 

 

 

연지(蓮池)

장릉에 들어가면 맨 먼저 맞닥뜨리는 공간인데, 모양은 예나 지금이나 변함이 없지만 연못의 식생은 변화를 거듭하며 지금의 연지에 이르렀고, 나는 이 연지에 애절한 사연을 하나 간직하고 있다.

 

나는 내 집 옥상에 채소와 화초만 키운 게 아니고 내 아이들이 어렸을 적에는 여러 동물들을 차례로 키웠는데, 한 번은 김포 5일장에서 오리 병아리 15마리를 사가지고 와서 키웠다, 몇 달을 키우니 어른이 돼서 감당이 버거워 지인들에게 나누어 주고 2마리가 남았다.

 

문득 옛날에 맛있게 먹었던 오리탕 생각이 나서 오리탕을 해 먹기로 했는데, 문제는 오리를 잡는 거였다. 잔인하게 잡는 것은 못하겠고 그래서 굵은 낚싯줄로 올가미를 만들어 그걸로 빨랫줄 기둥에 묶어 두고, 이젠 됐겠거니 하고 올라가 보면 동그랗고 예쁜 눈을 말똥말똥 뜨고 있는 거다.  아!  백정(白丁)은 아무나 하는 게 아니고 할 수도 없겠구나!

 

그렇게 그렇게 해서 오리탕을 먹는데, 세 사람은 맛있다고 잘 먹는데 나는 목구멍에 넘어가질 않아 국물만 먹었다. 이제 남은 한 마리가 문제인데, 더는 그 짓을 못하겠고, 오리가 몇 마리 노닐던 장릉 연지가 생각나서 이 연지에 넣어주기로 하고 온 가족이 주말에 가서 오리의 행복을 빌었다. 그리고 그 다음 주말에 또 온 가족이 오리를 보러 갔는데 우리 오리만 사라졌다. 순간 아이들의 울음보가 터져버렸고 그 상황을 수습하느라 서둘러 강화도로 내달렸고, 그 이후로 한동안은 장릉에 가질 않았다.

 

그 후에도 동물과의 이별의 아픔은 계속되었고 딸 아이가 애지중지 하던 고양이를 하늘 나라로 보내면서 이제 더 이상 이별의 아픔으로 상처받지 말자고 정리했다.

 

 

 

 

 

 

 

 

재실 - 관리사무소

능지기가 살았던 곳이리라 생각된다.

딘풍나무는 아닌데 부지런하게도 벌써 겨울채비를 하고 있다.

장릉에서 이 녀석이 가장 부지런하다.

 

 

 

 

 

 

 

장릉(章陵)

조선의 16대 왕 인조(1595∼1649)의 아버지 원종(1580∼1619)과 어머니인 구사맹(具思孟)의 딸 인헌왕후(仁獻王后)의 능으로 추존(追尊) 왕릉인데, 기이하게도 신도(神道)가 사라졌다. 관계자들이 모를리 없을텐데, 무슨 연유인지 모르겠다.

 

30여년 전에는 장릉은 물론 장릉산 일대가 군부대 일부를 제외하고는 무풍지대여서 완전히 프리-존(free zone)이었다.

 

재실에 사람은 살고 있었지만, 당시의 민도(民度)는 먹고 살기 바빠서 문화재가 뭔지 관심도 없었고 왕릉이고 뭐고 알 바 아니고 무시로 누구나 드나들 수 있어서 내 아이들도 이 장릉에서 수없이 뒹굴고 놀았으며, 훌쩍 커버린 지금 깔깔대며 함께 뒹굴었던 추억을 회상한다.

 

 

 

 

 

뽕나무

장릉 아래 왼쪽에 있는 뽕나무인데, 이 장릉을 조성하면서 인조가 직접 심었다 하니, 대략 400년 정도 이 자리를 지킨 셈이고 당시에도 양잠과 비단 만들기를 했었다는 얘기렸다.

 

 

 

 

 

우물(샘)

이 우물 또한 나와 내 가족하고 많은 교분을 가진 곳이다.

 

이상구 박사 신드롬이었던 것으로 기억된다. 건강관리에 대한 여러 얘기 중 좋은 물, 즉 좋은 생수가 건강에 좋다는 열풍이 불어서 수고를 마다하지 않고 강화도 찬우물에서 생수를 떠다 먹고 있었는데, 어느 날 가까이에 있는 장릉의 샘물이 좋다는 말을 듣고 이 샘물을 한동안 떠다 먹었다.

 

우물 너머의 도랑에는 가재가 살고 있었고, 아이들이 잡은 가재를 집에 가져가고 싶어 하는 걸, 집에 가져가면 결국은 죽게 되고 생명은 그 나름 제 값과 가치가 있다는 것을 장황하게 설명하여 도랑에 다시 놓아주고 다음 주에 또 보러오자고 통쾌한 합의를 하여 그 후에도 여러 번 가재들을 만났었다.

 

 

 

 

 

 

송림(松林)

장릉에는 멋진 곳과 향기로운 곳이 많지만 이 송림도 그 중의 하나로, 아마도 능을 조성하면서 조림된 소나무 아니겠나 생각된다. 이 송림은 지리산 시인 이원규 시인의 노래 “행여 지리산에 오시려거든”이 닫힌 듯 열려있듯이 이 장릉의 송림 또한 그런 공간이라 생각된다.

 

“혼자 오시면 안 되지만 그래도 꼭 오고 싶다면 혼자라도 오세요.” 이렇게 말이다.

 

 

 

 

 

 

 

산책로

굴참나무 숲이 우거진 이런 산책로가 있는데, 침묵하면서 걸어도 좋고 정답게 얘기하며 걸어도 좋다.

한 번이 섭섭하면 두 번 그래도 아쉬우면 몇 번을 걸어도 된다.

생각이 정리될 때까지.......

 

 

 

 

 

 

저수지

장릉의 피날레이면서 많은 것들을 담고 있는 곳이다.

어떤 사람은 이곳에 가슴 찢어지는 슬픔을 묻고 갔을 것이고 어떤 사람은 가슴 터지는 희망을 심어놓고 갔을 것이다.

 

사계절의 아름다움이 제각각인데 사진들이 날아가 버렸다.

아직 그래도 내게 사진을 담을 시간이야 충분하지 않겠나...

 

나와 함께 희노애락을 함께 해 온 곳들 중에서도 가장 오래된 곳의 하나인데, 내 블로그에 정식으로 처음으로 올리는 게 몹시 미안하다. 장릉의 진가를 몰라서가 아니라 사실은 나만의 비밀정원으로 오래도록 간직하고 싶은 생각이 많았던 것 같다. 하지만 지금은 복실이 워리 다 오고 옛 정취는 그림자처럼 남아 있다.

 

이 글을 보는 분들 중에 나와 함께 이 길을 걸었던 분은 그때 우리가 나누었던 마음을 추억할지도 모르겠다.

추억은 그런 것이다.

 

 

 

 

 

 

 

삶은 물결처럼 부단히 내일을 마주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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