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 주변

동작동 국립서울현충원의 터줏대감

아미고 Amigo 2021. 4. 24. 22:32

(2021.4.16.) 

 

국립서울현충원 현충문

 

(설립개요)

. 1953.9.29. - 현재의 국립서울현충원을 국군묘지 부지로 확정

. 1954.3.1. - 묘역 정지공사 착공 & 3년간 묘역조성

. 1965.3.30 - "국립묘지"로 승격

. 1968년까지 묘역관리 부대시설 등 공사

. 2005.7.29. - "국립서울현충원"으로 명칭 변경

 

 

창빈 안씨(昌嬪 安氏) 묘

결론부터 먼저 말하자면 국립서울현충원의 터줏대감은창빈 안씨(昌嬪 安氏. 1499∼1549)다. 400여년 동안 현충원을 지키고 있었으니 말이다.

 

창빈 안씨는 9살 때인 1507년(중종 2년)에 궁녀로 뽑혀 입궐하여 20살인 1518년(중종 13년)에 후궁이 되어,중종(中宗. 조선 11대 왕. 1488∼1544)의 총애를 받아 3남 1녀를 생산했는데, 둘째 아들은 일찍 죽고, 첫째 영양군셋째 덕흥군 그리고 정신 옹주까지 2남 1녀를 두었다고 한다.

 

당시는 정세가 매우 혼란했던 시기였고, 11대 중종이 승하하자 12대 인종이 1년도 안 돼서 급사하여 13대 명종이 왕위에 올랐으나 1567년에 34살의 나이로 후손 없이 승하하였다고 한다.

 

 

 

 

 

 

신도비(神道碑)

명종의 뒤를 이어 왕위에 오른 분이 바로선조(宣祖. 조선 제14대 왕. 1552∼1608)인데, 선조는 창빈 안씨의 셋째 아들인 덕흥군의 셋째 아들(하성군)로, 창빈 안씨에게는 손자이며, 이후 왕위는 선조의 후손들로 이어졌다니 창빈 안씨의 후손들이기도 한 것이다.

 

창빈 안씨가 1549년 50세에 돌아가시자, 덕흥군은 어머니를 경기도 장흥에 모셨다가 묏자리가 좋지 않다는 말에 길지를 찾아 지금의 현충원으로 이장하였다고 하며, 손자가 왕위에 등극하였으니 창빈 안씨의 묏자리가 명당이라는 소문이 자자하였다고 한다. (이상 중앙일보 기사 발췌 인용)

 

창빈 안씨(昌嬪 安氏)다.

복순이 순자 이름이 있었을 텐데, 출가하면 누구의 아내, 누구의 엄마, 누구의 며느리, 친정을 지칭하는 ㅇㅇ댁 일뿐 이름은 사라지고 이름 없이 산다.

이런 풍속의 밑바탕에는 권력이 자리 잡고 있어서, 결혼 전에는 아버지의 소유고, 결혼하면 남편의 소유이며, 남편이 죽으면 장자(長子)를 따르는 풍속이었으니 이를 가리켜 삼종지도(三從之道)라 하였으며, 여자를 사물화(事物化)했던 것이다.

 

그러나 세상이 많이 바뀌었고 또 바뀌어 가고 있다.

아이들의 양육과 학교 문제는 엄마의 권한이며, 집과 가구와 가전제품도 엄마의 권한이고, 아이들의 혼사도 엄마의 권한이며, 여행도 여자가 더 많이 다니고 여행지 선택도 여자의 권한이다. 반면에 남자의 권한도 있는데, 자동차 사는 것과 돈 벌어올 권한(?) 정도다.

 

그나마 남아있는 남자의 권한도 기성세대의 얘기고 맞벌이를 하는 쥬니어 세대는 여자가 수입이 더 많은 경우도 있고 전업남편도 있다.

바야흐로 부계사회(父系社會)에서 모계사회(母系社會)로 변화해가는 거 같다.

남자(수컷)의 세계가 상하의 계급사회라면, 여자(암컷)의 세계는 공존을 도모하는 net work 성격이 있어서 유대와 결속력이 강한 장점이 있다.

 

 

 

 

 

학도의용군 무명용사탑

 

 

 

 

 

 

일반묘역

 

 

 

 

 

 

장군묘역

 

 

 

 

 

 

김대중 대통령 묘역

 

 

 

 

 

 

김영삼 대통령 묘역

 

 

 

 

 

박정희 대통령 묘역

 

 

 

 

 

이승만 대통령 묘역

 

 

 

 

 

 

일상 보는 것들도 관심이 있어야 제대로 보이고 알아야 제대로 보이는 거 같다.

 

국립서울현충원은서달산(西達山. 179m)의 동쪽 품속에 있는데, 왜 서달산인지 난해하다. 궁궐과 북악산에서 보면 남쪽이어서 설명이 안 되고, 서달산에 “달마사(達磨寺)”가 있고 달마(達磨)가 서쪽에서 왔다고 하여 서달산이라는 설이 있으나, 달마사는 1931년에 창건되었으니 이거 역시 억지춘향이다.

 

그러나 위례성 시대에 붙여진 이름이라면 쉽게 이해가 될 수도 있겠다.

 

 

 

 

 

겸재 정선의 “동작진(銅雀津)”

진경산수화의 대가인 겸재 정선이 18세기 중엽에 그린 '동작진(銅雀津)'은 바로 지금의 현충원 일대가 배경이라고 하며, 뒤에 있는 높은 산은 관악산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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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간에 금석학의 금석문(金石文)에 대해 귀동냥을 조금 했다.

그래서 동작동 국립현충원의 터줏대감 창빈안씨의 묘를 다시 찾아봤다.

묘 입구에 길잡이 역할도 하며 생전의 업적 등을 새긴 신도비(神道碑)가 있는데, 참 재미있는 문구로 시작한다.

"유명조선국(有明朝鮮國)"이 바로 그것인데, 그 당시 중국은 明나라였으니 여러가지로 해석을 하는 모양인데, 그때는 중국의 눈치를 봐야하는 처지였다면, 지금은 미국과 중국의 눈치를 봐야하니 별로 변한 게 없는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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