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탄강 & 임진강

연천 숭의전 – 고려 유적

아미고 Amigo 2021. 1. 31. 15:12

(2019.1.29) 

 

왕들은 죽어서 어디로 가나.....

 

숭의전(崇義殿)

 

연천군 미산면 아미리에 있는 지금의 숭의전이 위치한 곳에는 원래 고려 태조 왕건의 원찰(願刹)이었던 앙암사(仰巖寺)가 있었는데, 왕건은 송악(개성)과 평강(철원)을 오가며 앙암사를 자주 들렀다고 한다.

 

 

 

 

 

 

 

어수정(御水井)

이 샘물은 왕건이 개성과 철원을 오갈 때 앙암사에 들르면서 마셨다 하여 어수정이란 명칭을 붙였다고 한다.

 

 

 

 

 

 

 

어수정 바로 옆에 홍살문(紅箭門)과 하마비(下馬碑)가 있으며, 이 길을 따라 임진강 쪽으로 돌아가면 숭의전이 나오는데, 몇 걸음 안 된다.

 

 

 

 

 

 

 

숭의전 전경

 

숭의전은 조선 시대의 대표적인 묘전(廟殿)으로 1971년에 사적 제223호로 지정되었다고 하며, 이곳에 1397년(태조 6년)에 고려 태조 왕건의 위패를 모시는 사당을 건립한 것이 지금의 숭의전의 시초였다고 한다.

 

이후 1425년(세종 7년)에 태조, 현종, 문종, 원종 4왕 만을 봉향토록 하였다가 1451년(문종 1년)에는 고려 4왕과 더불어 고려조의 충신 16명을 배향하였다고 한다. 또한 숭의전은 6.25 한국전쟁 때에 전소된 것을 1970년대에 사적으로 지정하며 지금의 모습으로 복원하였다고 한다.

 

 

 

 

 

 

 

 

천수문(天授門)

 

외삼문인 천수문인데 숭의전으로 바로 들어갈 수 있는 문이다.

고려의 유적은 거의 모두가 북한에 있기 때문에 남한에서 볼 수 있는 고려 유적의 대표적인 것이 바로 이 숭의전 아닐까 생각된다.

 

 

 

 

 

 

 

숭의전(崇義殿)

 

숭의전에는 고려 태조 왕건과 현종, 문종, 원종의 위패가 모셔져 있으며 기이한 이야기가 전해져 내려오고 있다.

 

개성에서 돌로 만든 배에 왕건의 시신을 실어 띄워 보냈는데, 배가 임진강 “썩은소”에 머물고 있어서 그곳에 위패를 모시려고 쇠줄로 배를 단단히 묶어두고 다음 날 보니 쇠줄이 삭아서 없어지고 배가 조금 더 떠내려와 지금의 잠두봉 자리에 머물고 있어서 이곳에 숭의전을 건립하였고 “썩은소”의 얘기는 “쇠줄”이 삭았다 하여 “썩은쇠”가 발음하기 편한 “썩은소”로 변음된 것으로 전해진다.

 

이런 이야기와 태봉국(泰封國)을 세우기 위해 지방의 호족들과 연합하며 궁예(弓裔) 특유의 미륵관심법(彌勒觀心法)이라는 신정적이면서도 전제주의 통치방식 그리고 궁예의 부하였다가 그를 제거하고 고려(高麗)를 세운 왕건(王建)이 활동했던 시대에는 그들의 세력이 미약하여 계속 호족들과 연합하며 세를 확장해가는 상황이었음에도 민생고에 시달린 백성들은 태평한 미륵세상(彌勒世上)이 도래하기를 염원하는 마음과 맞물려 신정(神政)에 가까운 전제정(專制政)이 펼쳐지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을 해보았다.

 

 

 

 

 

 

 

이안청(移安廳)

 

이안청은 숭의전의 위패를 잠시 편안하게 옮겨놓는 곳이라 한다.

 

궁예의 출생에 대하여는 설이 많지만, 신라 출신의 혈혈단신으로 신라를 배척하여 여기저기서 세력을 도모하고 왕건의 도움을 받아 권력을 장악한 뒤 상당한 분량의 경전을 손수 쓰고 통치 수단으로 미륵관심법이라는 것을 쓰는 등, “머리는 빌려 써도 건강은 빌려 쓰지 못한다”고 했던 어떤 사람보다는 학실히 뛰어난 사람이었던 것 같다.

 

궁예의 지나친 신정과 전제정에 신하들과 백성들 모두 진저리가 난 상황에서 개성의 호족 집안의 아들로 상당한 인적 물적 기반을 이미 가지고 있었던 왕건이 궁예를 몰아내고 정권을 잡은 후 궁예의 세력을 제거하는 것은 궁예가 혈혈단신으로 특정한 지지기반이 없었기에 손쉽게 처리할 수 있었을 것이다.

 

 

 

 

 

 

 

배신청(陪臣廳)

 

배신청에는 복지겸, 홍유, 신승겸, 유금필, 배현경, 서희, 강감찬, 윤관, 김부식, 김취려, 조충, 김방경, 안우, 이방실, 김득배, 정몽주 등 16명의 충신들의 위패가 모셔져 있다고 한다.

 

궁예와 왕건이 패권을 겨뤘던 흔적의 하나는 포천 관인면 중리에 있는 중리저수지와 지장산 계곡 위에 있는 “보개산성”에도 남아 있으며, 중리저수지도 한때는 내 낚시터였고 지장산 계곡도 내 가족의 피서지였는데 지금은 사람들이 너무 많아서 적당한 기회에 각시와 둘이서만 다녀온다.

 

권력의 속성은, 작은 모임의 회장에서부터 한 나라의 최고 권력자까지 언제나 자신의 발밑을 조심해야 되는 것 같더라.

 

 

 

 

 

 

전사청(典祀廳)

 

전사청은 제례 때 사용할 제수를 준비하는 곳이라 한다.

 

제례문화 이거 참 요즘 세상에 난감한 문제 중의 하나다.

이 문제 때문에 고부갈등은 물론이고 심지어는 부부생활이 파경에 이르는 경우도 있다고 한다.

 

장남인 나는 사후세계에 영혼 같은 건 없고 미풍양속이지만 그것도 시대에 따라 변화해야 한다고 생각했기에, 증조부까지 모시던 제례를 조부까지로, 그다음에는 부모님까지로 그리고 지금은 아버님 기일에 조상님들 모두를 모시는 것으로 간소화했으며, 동생들과 조카들의 참석 여부는 모두 자율에 맡기고 있다. 미래를 바라보며 따라가기도 만만치 않은 세상에 과거에 매달려 있을 필요가 별로 없다고 생각해서다.

 

 

 

 

 

 

 

앙암재(仰巖齋)

앙암재는 제례 때 사용하는 향, 축, 패 등을 보관하고 제관들이 제례 준비를 하기 위해 잠시 머무는 곳이라 한다.

 

 

 

 

 

 

 

제례를 올리는 자료사진의 모습이다.

 

궁예는 집권 기간도 짧았고 지지기반도 빈약하여 왕건이 권력을 장악하는 것이 손쉬웠지만, 고려의 34대 왕 공양왕으로부터 권력을 찬탈한 조선의 태조 이성계는 위화도 회군(威化島回軍)이니 역성혁명(易姓革命)이니 그렇게 기록되어 있지만 사실상 군사반란 아닌가!

 

왕 하나 바뀌어도 세상이 시끄러운데 반란으로 권력을 찬탈했으니 고려의 왕족들을 강화도와 거제도로 귀양을 보내고 참살하는 것은 물론 후환을 없애기 위해 왕씨(王氏) 왕족과 그 후원 세력까지 제거하다 보니 왕족들은 살아남기 위해 김씨 전씨 등등으로 창씨개명까지 했다고 하지 않은가.

 

 

 

 

 

 

그 모든 이야기들을 이 고목 나무는 알고 있을까?

전윤호 시인은 참 재미있는 시 한 편을 이곳 숭의전에 남겼다.

 

 

 

숭의전

 

왕들은 죽어서 어디로 가나

고려에서 조선을 지나

아직도 입시 중인 신하들

 

나라는 사라져 어디에 있나

개성은 길이 막히고

잠두봉 아래 임진강만 흐르는데

 

대문 앞 오백 살 먹은 느티나무

아직도 희망이 남아

솔부엉이 부부 새끼 둘 품었다.

 

부엉부엉 연천 하늘을 날아

철조망을 넘고 시간을 건너

비단 배 넘치는 벽란도로 가려나

 

왕들은 죽어서 어디로 가나

 

- 시인 전윤호 作 (봄날의 서재 中)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