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1.29)
신라의 마지막 왕, 경순왕의 이야기는 참 흥미진진하다.
경순왕릉(敬順王陵)은 우리가 봐서 알고 있는 왕릉에 비해서는 무척 소박하며 그 위치도 개경 주변이거나 서라벌 주변이 아니라 상당히 엉뚱한 연천 고랑포(高浪浦)라는 게 흥미진진하다.
그러나 스토리를 더듬어 가다 보면 궁금한 것들이 대부분 풀리리라 생각하지만, 그는 왜 이렇게 외진 곳에 잠들어야 했을까?
경순왕(敬順王. ?∼978)이 허울뿐인 왕위에 등극하던 시기에는 왕건(王建. 877∼943)의 고려와 견훤(甄萱. 867∼936)의 후백제 그리고 기울어가던 통일신라가 각축하던 때였다.
각축의 과정에서 왕건과 경애왕(景哀王. ?∼927. 신라 제55대 왕)은 견훤을 견제하기 위한 짬짜미를 하였고, 영악한 견훤이 이를 알아차려 신라를 기습공격하여 포석정에서 연회를 하던 경애왕을 생포하여 경애왕에게 자결을 강요하여 경애왕은 자결했다고 한다.
이런 과정의 결과로 경순왕(敬順王. ?∼978)은 견훤에 의해 신라 제56대 마지막 왕(927년∼935년 재위)으로 등극했으니 힘도 없고 맥빠진 왕이었던 셈이다.
고려 후백제 신라의 삼국 간의 각축 속에서 독자적 생존이 어렵다고 판단한 경순왕은 큰아들 마의태자와 막내아들 범공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그간의 역학관계와 은원관계를 고려하여 고려의 왕건에게 양국(讓國)하였다고 하니 결국 나라를 바치고 투항한 것이다.
양국(투항)의 보상으로 경순왕은 왕건의 딸 낙랑공주(樂浪公主. 생몰미상)와 결혼하여 개경에서 왕건으로부터 신분과 지위와 재물을 보장받았다.
이에 울분을 참지 못한 신라의 마의태자는 금강산으로 잠적해버렸고 막내아들 범공은 화엄사로 가서 스님이 되었다는데, 화엄사에서는 이런 내용을 보거나 들은 적이 없다.(내가 게으른 탓이었을 게다.)
동서고금을 불문하고 왕가의 권세와 재물이 풍족할 때는 족내혼(族內婚)이 성행했고, 반대의 경우에는 지방 토호들과의 정략결혼을 통해 권력과 재물을 늘려나갔는데, 왕건은 건국 초였으니 당연히 후자의 길을 걸었다.
비각과 비석인데 한문 실력이 부족한 내게 글자마저 읽을 수도 없는 지경이었다.
그러든 저러든 신라의 마지막 왕 경순왕은 왕건의 부마가 되어 개경에서 편히 살다가 운명을 하여 고향인 서라벌로 가려고 운구를 하는 중에 왕건이 서라벌의 정치적 동요를 염려하여 경순왕의 능을 개경 100리 이내로 제한하여 지금의 자리에 관을 내렸다고 하니 죽어서도 고향에 돌아가지 못한 왕이다.
신라의 왕 중 유일하게 서라벌(경주) 밖에 묻힌 왕이 경순왕이다.
재실의 모습이다.
감은사지와 감포 수중왕릉 그리고 용의 얘기로 신라의 왕들 중 가장 잘나갔던 문무대왕과 마지막 왕 경순왕을 대비해보면 잘나가는 인생은 시종일관 잘나가고, 꼬이는 인생은 끝까지 꼬이는 게 인생인 거 같기도 하다.
경순왕이 너무 외롭지 않겠나!
나라도 찾아가서 그 시절 얘기도 좀 들어보고 요즘 세상 이야기도 들려주면 어떨까 하는 생각이어서 지나는 길에 또는 일부러 찾아본다.
경순왕릉 입구에 있는 고랑포구(高浪浦口)는 포구의 흔적은 찾아볼 수도 없고 사료들을 정리해둔 역사공원이 만들어져 있으며, 1930년대에는 개성과 한성의 물자교류를 하는 화신백화점의 분점이 있을 정도로 번성하였으나 한국전쟁과 남북분단으로 쇠락하였는데, 뜬금없는 말 동상이 하나 있는데 한국전쟁 때 많은 기여를 했다고 한다.
임진강에 있는 고랑포구의 상류(위)와 하류(아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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