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12.8
경교장(京橋莊)
백범 김구(白凡 金九, 1876∼1949, 황해도 해주生) 선생의 저택이자 대한민국 임시정부 청사로도 사용되었던 경교장을 이제야 와 봤다.
그 많은 세월동안 뭐하고, 심지어 삼성병원 문병을 다니면서도 경교장 둘러볼 생각을 못했다니 나 자신이 한심한 생각도 들었다.
경교장은 최창학(崔昌學, 1891∼1959, 광산업자)이 1938년에 자신의 별장으로 완공하여 "죽첨장(竹添莊)"이라 했다는데, 이 건물을 최창학이 기부를 한 것인지, 김구 선생이나 임시정부에서 매입한 것인지 아니면 무상임대차를 한 것인지 기록을 찾아보지 못했다.
1945년 11월 임시정부 국무위원들과 함께 귀국한 김구 선생이 경교장이라 개칭하였으며, 김구 선생이 1949년 6월 26일 경교장 집무실에서 32세 나이의 "육군소위 안두희"에게 저격될 때까지 경교장에 살았다고 한다.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이동경로
상하이에서부터 항저우 - 전장 - 창사 - 광저우 - 류저우 - 치장 - 충칭까지 남서진 하였다가 북서진하였다.
김구 선생이 저격되고 나서 경교장은 외국 대사관 등으로 사용되다가 1968년에 고려병원(현 삼성병원)이 인수하였는데, 2005년 6월 13일 "사적 제465호"로 지정되었고, 경교장을 복원하기로 하여 2013년 3월 1일 개관하여 지금에 이르게 되는데,
정부가 매입한 것인지 삼성병원이 국가에 헌납한 것인지 아니면 삼성병원이 국가에게 무상임대를 하는 것인지 기록이 불분명하다.
김구 서명 태극기
김구 혈의(血衣)
안두희로부터 저격당할 때 입고 있었던 저고리라고 하는데...
야설(夜雪) - 답설야중거(踏雪野中去)
일반적으로는 임진왜란 때 승병(僧兵)을 일으켜 그의 제자 "유정(惟政, 1544∼1610)"과 함께 평양성 탈환에 혁혁한 공을 세운 "서산대사(西山大師, 청허(淸虛) 휴정(休靜)스님, 1520∼1604)"의 "답설야중거(踏雪野中去)"로 알려져 왔으나,
서산대사의 "청허집(淸虛集)"에는 실려 있지 않고, 이양연의 "임연당별집(臨淵堂別集)" 그리고 "대동시선(大東詩選)"에도 이양연의 작품으로 실려 있다고 하여, 이양연(李亮淵, 1771∼1853)이 지은 "야설(夜雪)"로 바로잡았다고 한다.
귀빈식당(위) & 임시정부 선전부 활동공간(아래)
1층 응접실(위) & 김구 침실(아래)
그 시절에 이만큼 화려한 집기비품들이었을지 의문이기도 하다.
2층 응접실 겸 서재(위) & 임시정부 요인 숙소(아래)
임시정부의 국무위원회(1945.12.28)
김구의 흉상과 집무실
김구 선생은 왜 초대 대통령이 되지 못했을까?
김구도 이승만도 모두 독립운동을 했지만, 김구는 대한민국 임시정부 주석(主席)을 맡았었고, 귀국해서도 열화와 같은 환영과 지지를 받았었는데 말이다.
제2차 세계대전에서 연합군의 승리가 가까워지는 즈음에 미국과 소련 그리고 영국 등은 "얄타회담(1945년 2월, 우크라이나 얄타)"과 "포츠담회담(1945년 7월, 독일 포츠담)" 등으로 땅 나눠먹기를 하고 있었고,
주권을 빼앗겼거나 침략을 당한 나라들은 윌슨(Woodrow Wilson, 1856∼1924, 미국의 28대 대통령)이 천명한 "민족자결주의"에 따라 독립을 하거나 국토를 회복하리라는 달콤한 동상이몽을 하고 있었지만,
미국의 원폭에 일본이 항복을 하고 나니, 한반도의 38선 이북에는 소련군이 진주하고, 뒤이어 38선 이남에는 미군이 진주하여 남북이 분단되었고, 남한은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될 때까지 "미군정(美軍政, 1945.9.12∼1948.8.15)"이 실행되었다.
미국은 군정 동안에 친미 정부를 세우기 위해 적합한 인물을 물색했을 것이고, 민족주의자이자 중국에 연고가 있는 김구 보다는 미국 문화에 길들여져 있는 이승만이 훨씬 더 입맛에 맞았을까?
미국은 제2차 세계대전 이후 동아시아에서 장개석(蔣介石, 1887∼1975)과 국민당 중심의 반공(反共) 진영을 구축하려는 구상을 하고 있었지만, 중국 내에서는 1944년부터 장개석과 모택동이 대립하고 있었고,
부패한 국민당이 모택동(毛澤東, 1893∼1976)의 공산당에 밀릴 것이라는 것을 이미 알고 있었을 것이니, 대강 아귀가 맞아떨어진다.
"안두희(安斗熙, 1917∼1996)"는 왜 김구 선생을 저격했을까?
평북 용천 출신으로 일본 메이지대 법학과를 중퇴하였고, 육사 특8기로 졸업하여 소위로 임관하여 김창룡(金昌龍, 1920∼1956)으로부터 지령을 받아 김구 선생을 저격하였다 하고,
종신형을 선고받았으나 3달 뒤 15년형으로 감형되었고, 1950년 한국전쟁이 발발하자 형집행정지로 군에 복귀하여, 1953.2.15일에 완전 복권되어 1953.12.15일 소령으로 예편하였다고 하는 것이 역사적 기록인데, 3류 코미디 같은 느낌이 든다.
이후 그는 숨어 살면서 수차 생명의 위협을 당했으나 고비를 잘 넘기다가 1996.10.23일 인천 자신의 집에서 박기서로부터 79세의 나이에 살해되었으며, 그에게 지령을 내렸던 김창룡은 그의 부하로부터 저격당했다.
김구 선생을 저격한 안두희가 79세까지 장수하였고, 광주 민주화운동 때 수많은 시민을 학살한 전두환도 건재하는 대한민국은 코미디공화국 아닐까?
보통의 영화에서는 저격범을 또 다른 저격범이 저격하고, 그를 또 다른 저격범이 저격하여, 실제로 저격을 명령한 자의 꼬리를 자르던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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