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연문화

윤형주의 사랑 노래 이야기

아미고 Amigo 2018. 2. 19. 21:14

 

 

윤형주의 사랑 노래 이야기

 

설날을 몇일 앞두고 통기타 가수로 불렸던 윤형주의 노래와 이야기를 들을 수 있는 기회가 있었다.

 

의례적인 얘기가 끝나고 자신의 얘기를 시작했다.

"나이 칠십이 넘어가니까 이제 좀 할 얘기가 있어요."

 

올해로 그의 나이 일흔 둘이니 젊은 할배다.

 

 

 

윤형주씨가 70을 넘기고서야 이제 좀 할 말이 있다니 나는 아직 한참 멀었다.

뒤통수를 세게 한 방 얻어맞은 느낌이었다.

 

 

 

 

인터넷 자료검색을 해보았다.

 

경기고를 졸업하고 연대 의대를 들어갔으니 공부를 참 잘 했던가 보다.

그런데 노래에 빠져 의사 안하겠다고 학교를 중퇴해버리니 부모님이 달래고 달래서 경희대 의대로 전학을 시켜서 "의사자격증"을 딸 때까지만 공부를 하라고 달랬던 모양이다.

 

하지만 본인은 하지도 않을 "의사자격증"은 뭐하려 따냐고 또 다시 중퇴를 해버리고 본격적으로 가수의 길을 걸었다고 한다.

 

의사의 길을 갔더라도 분명 좋은 의사가 되어 많은 사람들에게 삶의 희망을 주었겠지만, 가수로써 더 많은 사람들에게 위안이 되고 희망을 주었으니, 내 생각으로는 좋은 선택을 하였던 것 같다.

 

 

 

 

윤형주씨는 1968년에 송창식과 함께 남성 듀엣 "트윈 폴리오(Twin Folio)"를 결성하여 가요계에 데뷔하여  "하얀 손수건",  "축제의 노래",  "웨딩케익"  등등 아름다운 노래들을 불렀다.

 

그러고 보니 올해로 가수생활 50주년인 셈이다.

가수로, 작곡가로, 작사가로, 편곡가로, 방송인으로 50년을 살아왔으니 참 긴 세월이다.

 

1970년부터는 솔로로 전향하여  "비와 나",  "조개껍질 묶어",  "두개의 작은 별",  "우리들의 이야기",  어제 내린 비",  "별 헤는 밤"  등등 70∼80년대의 해수욕장의 백사장과 강변 그리고 숲속을 들석이게 했던 노래들이 수두룩 하다.

 

그의 노래는 대체로 밝고 명랑하고 서정적이다.

이 대목에서 그가 또 한마디 했다.

"내 젊은 날은 순수했었고 그런 날들에 대해 자부심을 갖고 살았었다."

 

 

 

 

윤형주씨는 "세시봉(C'est si bon)"이라는 무교동의 음악감상실을 중심으로 활동했으며, 세시봉의 멤버들은 윤형주 외에 김세환, 송창식, 이장희, 조영남, 한대수 등으로 알려져 있는데, 근래에 그림 대작 문제로 가십 거리가 되고 있는 조영남씨의 행보가 독특하다.

 

대작, 위작 문제 보다도, 술집에 가서 팁은 10만원도 훨씬 더 줬을텐데 하는 것으로 생각이 번지면 생각하기가 싫어지고.....

 

윤형주를 좋아했던 소녀들이 아주머니가 되었고 다시 할머니가 되어 윤형주의 노래와 이야기를 들으며 양탄자를 타고 70∼80년대로 날아갔던 시간이었다.

힘껏 박수치고 열창을 하면서.....

 

마무리 한 말씀 더 하신다.

"세상에서 가장 힘든 직책이 아버지입니다."

 

 

 

 

놀라운 얘기였다.

우리나라 CM송의 대략 1/3 정도가 윤형주의 것이란다.

밝고 명랑하고 서정적인 데다가 친근감을 주는 음색이 어필이 잘 되는 모양이다.

 

윤형주는 "한국 해비타트(Habitat: 주거빈곤퇴치)" 이사장이기도 하다.

 

 

 

 

 

윤형주는 시인 윤동주의 6촌 동생이란다.

그래서 윤동주 기념사업회의 일도 맡아서 하고 있다고 한다.

 

 

 

후쿠오카 감옥에서 산화한 시인 윤동주의 문학관(윤동주 문학관)은 인왕산과 북악산이 만나는 자하문(창의문) 고갯길의 인왕산 자락에 있다.

 

"윤동주 문학관" 뒤에는 "시인의 언덕"이 있으며 그 언덕에는 "서시"가 새겨진 시비가 서촌과 남산 그리고 한강을 굽어보고 있다.

 

윤동주에 대한 이야기는 내 블로그에 "윤동주 문학관""백사실계곡"이라는 타이틀로 올린 바 있다.

 

(동영상은 안되지만 사진 촬영은 허용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