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연문화

마리 앙투아네트 & 프랑스혁명

아미고 Amigo 2014. 12. 24. 09:23

 

 

 

마리 앙투아네트 Josephe-Jeanne-Marie-Antoinette
(1755.11.2 ~ 1793.10.16 : 38년)

 

 

내 생일이라고 아이들에게서 뮤지컬 티켓을 선물 받았다. 

 

오스트리아 합스부르크 왕가에서 마리아 테레지아와 프란츠 슈테판
슬하의 16명의 형제자매 중 막내로 태어나 충분한 교육도 받지 못해
외국어(프랑스어와 이탈리아어)도 어눌했던 14살의 어린 소녀로,
18세기 당시 유럽의 양대 왕가였던 오스트리아의 합스부르크 왕가에서
앙숙관계였던 프랑스의 부르봉 왕가의 루이16세의 아내가 되어
프랑스의 왕비가 되었던 여자.

 

그러나 그 결혼은 사랑 때문에 이루어진 결혼이 아니라,
당시 프랑스를 제외한 유럽 전역을 거의 다 통치했던 그녀의 어머니
마리아 테레지아 여제의 정치적 계산에 따라 이루어졌던

 

정략결혼의 제물이 되었던 여자.

 

 

수줍어하고 내성적이었던 루이 16세에 비해 쾌활하고 명랑했던 마리
앙투아네트는 낯설고 물설은 베르사유궁이라는, 어쩌면 크고 호화로운
감옥에서 음악, 미술, 사교와 파티 등으로 "작은 요정"으로서의
존재감을 느끼며 살았던 여자.

 

사치와 낭비로 "적자부인(赤字夫人)" 이라는 오명을 뒤집어썼고
정부(情夫)의 염문에 시달렸으며, 굶주리는 백성들에게
"빵이 없으면 케이크를 먹으면 되지 않느냐?" 라고 하여
세상의 모든 미움을 한 몸에 걸머졌고
엄청나게 값비싼 다이아몬드 목걸이 사건에 연루되어
프랑스혁명에 하나의 도화선이 되어 38살의 젊은 나이에
단두대(기요틴 guillotine)의 이슬로 사라졌던 여자.......

 

 

 

그런 이야기를 담은 뮤지컬 "마리 앙투아네트"

그걸 보면서 많은 생각들이 과거(당시)와 현실의 우리 사회를 오락가락했다.

 

 

근데 요즈음 세간에...

모두지 말이 안 통하는 여자...

자기 고집대로만 하는 여자가 한 사람 있는데...

 

그 여자가 바로...

"마리 앙투아네트"라고 한다.

실명은 "박투아네트"...

 

 

 

마리 앙투아네트와 루이 16세

 

 

그러나 가만히 생각해 보면.....

16명의 형제자매 중 살아 남은 10명의 형제자매 속에서 쇤부른 궁전에서

천방지축으로 생기 발랄하게 뛰놀던 14살의 아이가 어느 날 갑자기 왕비가 되어

루이 14세때 만들어졌던 에티켓(etiquette)이라는 프랑스의  궁정

베르사유의 질식할 것만 같은 규범 속에서 즐거움을 느낄 수 있는 것들이

음악, 미술 그리고 파티와 사교 외에 다른 무엇이 얼마나 있었을까?

 

 

게다가 평소 앙숙이었던 오스트리아의 공주가 프랑스의 왕비가 되었으니

애시당초 미운 오리 새끼였던 데다가, 에티켓에 서툴렀으니 더 더욱

얄밉고 조롱거리가 될 수 밖에 없는 처지였으며,

 

말 많은 프랑스인들이 "빵이 없으면 케이크 먹어라"는 유언비어까지

만들어 유포를 하고, 급기야는 "다이아몬드 사건"이라는 음모까지 꾸며

 

그녀를 궁지(희생양)로 몰아 프랑스혁명이라는 세계사적 격랑의 한 주역으로

내몰려 단두대의 처형이라는 처참한 죽음을 눈 앞에 두고도

품위를 잃지 않고 의연한 죽음을 맞이한

비련의 마리 앙투아네트.....

 

 

그러나 프랑스혁명의 싹은.......

루이 14세가 시작한 베르사유궁전의 대공사를 위한 백성들의 세금 불만...

적대관계였던 영국과의 독립전쟁을 치르던 미국의 전쟁비용을

지원하는 데 따른 재정파탄...

 

그리고 시의적절하게 움트고 꽃피었던 "계몽주의(볼테르, 몽테스키외, 루소 등)"

사상 등에서 비롯된 것이며, 다만 마리 앙투아네트는

백성들의 그런 불만과 증오의 표적으로 가장 안성맞춤인 대상은 아니었을까?

 

 

 

 

 

오스트리아 여왕 마리아 테레지아의 막내딸로 빈에서 출생하였다. 1770년 5월 16일 14세 때 정략결혼으로 1774년 그 동안 적대적이었던 프랑스의 왕비가 되었다. 베르사유 궁전의 트리아농관(館)에서 살았으며, 사교·관극(觀劇)·수렵·미술·음악 등의 모임에 그녀의 아름다운 모습을 나타내어 작은 요정(妖精)이라고 불렸다. 검소한 국왕 루이 16세와는 대조를 이루어 ‘적자부인(赤字夫人)’이라는 빈축을 사기도 하였으며, 1785년의 ‘다이아몬드 목걸이 사건’은 그녀의 명성에 상처를 입혔다.

 

또, 그녀는 스웨덴의 미남 무관 페르센을 비롯하여 몇 사람의 연인이 있었다. 1789년에 시작된 프랑스혁명은 그녀의 일생을 완전히 바꿔 놓았다. 왕과 그 일족은 1789년 10월 6일 파리의 왕궁으로 연행되어 1792년 8월 10일까지 시민의 감시 아래 불안한 생활을 해야만 하였다. 그 사이 그녀는 퇴영적(새로운 일에 좀처럼 손대기를 꺼려하여 나서지 아니하고 망설이는, 또는 그런 것.)이며 선량한 루이 16세를 격려하기도 하고, 왕가의 안녕을 위해 미라보 매수에 일익을 담당하기도 하였으나, 1792년 8월 10일의 시민봉기로 그녀는 탕플탑(塔)에 유폐되고, 국고를 낭비한 죄와 오스트리아와 공모하여 반혁명을 시도하였다는 죄명으로 1793년 10월 16일 단두대의 이슬로 사라졌다. 그녀에게는 왕과의 사이에 4명의 자녀가 있었으나, 장녀 마리 테레즈만이 성인이 되어 훗날 당글렘 공비(公妃)가 되었으며, 차남 루이 17세는 1795년 감옥에서 폐결핵으로 사망하였다.

 

 

그녀의 삶은 사치, 낭비, 향락으로 프랑스 혁명을 재촉한 것으로 지목되는가 하면, 혁명의 소용돌이 속에 부당하게 폄하되고 마침내 죽임을 당한 비운의 여인으로 동정 받기도 한다.

 

 

 

1770년 5월 16일 오전 9시30분쯤, 베르사유의 건물 모든 창문에서 사람들이 고개를 내밀고 바깥을 쳐다보고 있었다. 합스부르크 공국의 여제 마리아 테레지아의 14살 난 딸 마리아 안토니아 요제파 요한나 폰 합스부르크-로트링겐은 이제 마리 앙투아네트 조제프 잔 드 압스부르-로렌이 될 참이었다. 한 살 많은 신랑은 프랑스 국왕 루이 15세의 손자 루이 오귀스트, 이후 루이 16세가 될 왕세자였다. 왕실 예배당에서 거행된 결혼식에서 신랑은 대체로 부루퉁하며 생기가 없었으며 결혼반지를 신부의 손가락에 끼워 주는 손길은 약간 떨렸다. 혼인 서약서에 서명할 때는 신랑의 서명이 정확하고 분명했던 데 비해, 신부의 서명은 ‘조제프’를 적을 때 J자에 커다랗게 번진 얼룩을 남겼다. 왕실 풍습에 따라 루이 15세는 신혼부부의 침실로 와서 손자에게 잠옷을 건넸고 샤르트르 공작부인이 신부에게 잠옷을 건넸다. 신랑과 신부가 침대로 들어간 뒤 궁정의 많은 사람들이 침대 앞에서 절을 하고 밖으로 물러갔다.

 

 

유럽 왕실의 결혼 대부분이 그러했듯 이 날의 결혼도 프랑스와 합스부르크 공국 사이의 정략적 이해관계에 따른 것이었다. 프랑스의 많은 사람들이 이 결혼 동맹으로 합스부르크 공국이 얻을 이익이 더 크다고 보고 있었고, 부르봉 가문의 후계자가 합스부르크 가문의 혈통에서 나온다는 것에 불만을 품은 귀족들도 적지 않았으며, 합스부르크 공국의 외교사절들은 황태자 부부를 조종하려 했다.


그녀는 '매우 평범한18세기 유럽 왕실 소녀였다.

 

마리 앙투아네트의 어린 시절은 전형적인 유럽 왕실의 그것, 즉 왕실 행사에 참석하고 또래 왕족들과 어울려 놀며 예법과 교양도 쌓는 평온 안락한 생활이었다. 18세기 유럽 공주들이 받은 교육의 수준은 높지 않았다. 마리 앙투아네트는 쓰기에서 곤란을 겪었다.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느리게 쓰는 습관을 익혔다”는 증언이 있다. 아주 느리게 쓰고 종종 얼룩이 번지고 철자도 틀렸던 것. (결혼서약 서명을 할 때 그녀가 얼마나 긴장했을지 짐작할 수 있다.) 읽기에서도 죄의식을 느낄 정도로 읽기를 겁냈다.

 

그녀가 받은 교육에서 가장 큰 문제는, 아무도 그녀에게 집중력을 키워 주지 않았다는 데 있었다. 어른이 되어서도 그녀는 대화 도중 “메뚜기처럼” 다른 곳으로 건너뛰는 경향을 보였고, 한 가지 일에 주의를 집중하기 못하고 빠르게 관심이 바뀌며 산만할 때가 많았다. 물론 이것을 그녀 자신 탓으로 돌리기는 힘들다. 어느 정도 인내하면서 주어진 과제를 끝내는 방식의 교육을 아무도 그녀에게 시키지 않았으니 말이다. 13살 무렵까지 독일어 외에, 프랑스어, 이탈리어를 말할 줄 알았지만 프랑스어는 독일어 구문이 자주 튀어나오는 엉성한 수준이었다. 프랑스 왕실이 파견한 베르몽 주교가 1년간 가르친 끝에 결혼할 무렵부터 비교적 유창하게 구사했다.

 

성격에 대해서만큼은 많은 사람들이 그녀가 본성이 상냥하고 친절하다고 긍정적으로 평가했다. 예쁜 용모에 착하고 상냥하며 예술을 애호하지만, 산만하고 쓰기와 읽기 능력이 부족한 편인 14살 소녀. 18세기 유럽 왕실에서 매우 평범한 한 소녀였던 셈이다.

 

"빵이 없으면 케이크를 먹으라고 하세요" - 그녀가 하지 않은 말

 

마리 앙투아네트가 했다는 이 말은 그가 세상물정에 얼마나 어둡고 국민들이 처한 상황에 무지하며 무관심했는지 보여 주는 사례로 회자되곤 한다. 프랑스 국민들이 먹을 빵이 없어 굶주림에 고통 받는다는 말을 듣자 마리 앙투아네트가 그와 같이 말했다는 것. 그러나 실제로는 루이 14세의 아내였던 스페인 왕가 출신 마리 테레즈 왕비의 말이라는 설이 유력하다. 마리 테레즈가 “빵이 없다면 파이의 딱딱한 껍질을 먹게 하라” 말했다는 것. 마리 앙투아네트는 프랑스 왕실에서 유일하게 소작인의 밭으로 마차를 몰아 밭을 망치는 짓을 거부했으며, 가난한 사람들의 삶에 관해서도 잘 알고 있었다.

 

그러나 그녀는 프랑스에 불행을 몰고 오리라는 악의적인 선전에 시달려야 했고, 혼외정사를 하며 정부를 갈아치우는 음탕한 여자라는 소문, 동성연애를 한다는 소문, 그녀가 낳은 왕자가 루이 16세의 소생이 아니라는 소문 등 갖가지 나쁜 소문에 시달렸다. 라 모트 백작부인을 비롯한 일당이 추기경과 보석상을 속이고 왕비를 사칭하여 다이아몬드 목걸이를 편취한 일명 ‘목걸이 사건’은 마리 앙투아네트의 평판에 결정적인 악영향을 미쳤다. 사건 연루자들은 재판에서 마리 앙투아네트의 소행임을 주장했고, 프랑스 국민들은 그들의 말을 믿으려 했다.

 

남편 루이 16세는 부끄러움을 잘 타고 소심하며 우유부단하고 내성적인데다가, 취미도 사냥하는 것 외에 자물쇠를 만들거나 돌을 다듬는 것 정도였다. 왕비와 함께 공연을 감상할 때도 있었지만 지루해 할 때가 많았다. “가여운 어린 것, 너는 그들이 바라던 아이는 아니지만 난 너를 사랑한단다. 아들이었다면 국가의 것이 되었겠지만, 너는 내 것이고 내가 보살필 거야. 너는 나와 기쁨을 함께 하고 슬픔을 나누게 될 거야.” 결혼 7년 만에(1778) 장녀 마리-테레즈 샤를로트가 태어났을 때 했다는 이 말은 마리 앙투아네트의 정 붙일 곳 없는 궁정 생활의 외로움을 말해주는 듯하다. 그런 외로움 탓이었을까. 호화로운 파티와 무도회를 자주 열고 의복, 장신구, 보석에 많은 비용을 들였으며, 베르사유의 프티 트리아농을 호화롭게 개조하는 데 국고를 소비하기도 했다.


루이 16세가 1793년 1월 21일에 처형됐고 앙투아네트는 사형 판결을 받았다.

 

1787년 소피 엘렌 베아트리스 공주의 죽음과 1789년 루이 조제프 왕자의 죽음 사이의 10여 년은 프랑스 혁명의 여건과 분위기가 무르익는 시기, 마리 앙투아네트 개인의 운명 측면에서는 비극을 향해 치닫는 시기였다. 식료품 가격 폭등, 거듭된 자연 재해, 국가 재정 파탄으로 사회 불안과 불만이 고조되었고, 마리 앙투아네트를 둘러 싼 악의적인 소문이 날로 증폭되어갔다. 루이 16세는 성품이 선량하고 즉위(1774년) 초반 국정 개혁을 시도하기도 했지만 복잡하고 총체적인 난국을 타개할 만한 리더십과 능력은 애당초 없었다. 불안과 긴장이 고조된 가운데 1789년 5월 루이 16세는 175년 만에 삼부회를 소집했지만, 신분제의회를 인정하지 않는 제3신분 대의원들은 6월에 국민의회 성립을 의결하고 입헌군주제를 추진했다. 그리고 7월 14일 바스티유 감옥 습격으로 프랑스 혁명이 시작됐다.

 

파리 시민들은 10월에 베르사유를 습격했고 왕실 가족은 튈르리 궁에 유폐되었다. 왕실 가족은 1791년 6월 20일 왕당파 세력이 강한 몽메디로 도주하려 했지만 바렌에서 붙잡혀 실패했다. 이후 탕플에 유폐되었다가 루이 16세가 1793년 1월 21일에 처형됐다. 마리 앙투아네트는 10월 15일 사형 판결을 받았다. 마리 앙투아네트를 비난하기 위한 음란 팸플릿들이 혁명을 달군 중요한 불쏘시개들 가운데 하나였으니, 그녀는 절대군주제 타도를 위한 혁명의 불길 속에 적의와 분노의 표적으로 설정된 하나의 희생양, 가공된 악(惡)이었던가?


"용기가 나를 저버릴 리가 없어요" - 단두대의 이슬로 끝난 삶

 

“나는 방금 사형선고를 받았어요.(……) 당신의 오빠(루이 16세)와 마찬가지로 죄가 없기에 나는 그가 마지막에 보여 준 확고부동함을 보여 줄 수 있기를 바랍니다. 양심이 깨끗한 사람들이 그렇듯이 나는 평온합니다. 나로서 가장 유감스러운 일은 가엾은 아이들을 두고 가야 한다는 점입니다. 내가 오직 아이들을 위해서 살아왔다는 것을 당신은 잘 알 겁니다.”

 

1793년 10월 16일 새벽 4시30분에 마리 앙투아네트가 시누이(이듬해 처형당함)에게 쓴 편지다. 헌병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흰 옷으로 갈아입고 머리카락을 잘린 뒤 손이 묶였다. 11시에 수레에 태워져 콩코드 광장으로 향했다. “오스트리아 여자가 지나간다!” “뻔뻔스러운 앙투아네트가 여기 있다!” 기요틴 처형대 계단을 오르며 그녀는 처형 집행인 샤를 앙리 상송의 발을 살짝 밟고 사과했다. “실례했습니다. 일부러 그런 것이 아니었어요.” 종교의례를 강요하는 신부에게 그녀가 말했다. “내 불행이 끝나 가려는 순간에 용기가 나를 저버릴 리가 없어요.” 12시15분, 38세 생일을 약 2주 앞둔 날 그녀의 목이 잘렸다.

 

‘심약한 남편을 휘두르며 고국을 위해 스파이 활동을 하여 프랑스를 배신하고, 사생활이 추잡하기 이를 데가 없었으며 심지어 아들과 근친상간을 한 여자.’ 마리 앙투아네트의 처형에 프랑스 국민들은 열광했다. “국민의 피를 게걸스럽게 먹던 거만한 오스트리아 여자의 머리가 마침내 떨어졌다.” 처형 이후 혁명재판소가 받은 축하문들 가운데 하나다. 부르봉 왕가 복고 시기인 1815년 1월 21일, 그녀와 루이 16세의 시신은 생 드니 성당 지하 납골소에 안치됐다. 이들 사이의 소생은 딸 마리-테레즈 샤를로트(1778?1851), 아들 루이 조제프(1781?1789), 아들 루이 샤를(1785-1795), 딸 소피-엘렌 베아트릭스(1786-1787) 등이다.  (표정훈씨의 글 인용)

 

 

 

나는 그녀가 왕비.하녀를 넘어 결국에는 여자였고 어머니였다는 것을 생각하게 한다.

여자는 더러 요망하기도 할지 모르겠지만, 어머니는 모두 다 어머니이다.

세상에 어머니 없이 태어난 놈이 어디 있겠나...

 

죽어가는 시각에도, 왕가의 그리고 왕비의 기품을 잃지 않았으니...

나는 박수를 보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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