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향(大鄕) 이중섭(李仲燮)
지인과 경복궁 부근에서 점심 약속이 있어 점심을 먹고, 떡 본 김에 제사 지내고, 엎어진 김에 쉬었다 간다고, 마침 이중섭 작품 전시회가 있으니 잠시 들러 보자는 지인의 손에 이끌려 지척간에 있는 현대화랑에서 입 호강에 이어 눈 호강까지 했다.
도록도 없어 편하게 나만, 눈으로만 감상했다.
명색이 문화와 교양에 대한 분야도 전공했지만 남을 평하기에는 내가 너무 일천하다.
대향(大鄕) 이중섭(李仲燮)
ㅇ 생몰 : 1916년 ~ 1956년(40년)
ㅇ 학력 : 오산고등보통학교 - 일본 도쿄 제국미술학교(현 무사시노미술대학) 서양화과
입학 & 중퇴 - 분카가쿠엔(文化學院) 미술과 졸업
ㅇ 작품
가족에게 둘러싸여 그림을 그리는 화가, 구상네 가족, 길 떠나는 가족, 나무와 달과 하얀새, 달과 까마귀, 누운 소, 닭과 가족, 덤벼드는 소, 도원, 두 아이와 물고기와 게, 부부, 사내와 아이들, 서귀포의 환상, 소와 어린이, 싸우는 소, 움직이는 흰소, 투계, 황소, 흰소 外
ㅇ 생애활동
평안남도 평원군에서 이희주(李熙周)의 삼남매 중 둘째 아들로 태어나 오산고보에서 당시 미술 교사였던 임용련(任用璉)의 지도를 받으면서 화가로서의 꿈을 키워 1937년 일본으로 건너가 제국미술학교에 입학했다가 중퇴하고 분카가쿠엔(文化學院) 미술과에 입학하였다. 재학 중 독립전(獨立展)과 자유전(自由展)에 출품하여 신인으로서의 각광을 받았다. 문화학원을 졸업하던 1940년에는 미술창작가협회전(자유전의 개칭)에 출품하여 협회상을 수상하였다. 1943년에도 역시 같은 협회전에서는 태양상(太陽賞)을 수상하였다.
이 무렵 일본인 여성 야마모토 마사꼬(山本方子, 한국식 이름-이남덕)와 1945년 원산에서 결혼하여 1946년에 첫 아이를 얻었지만 디프테리아로 잃게 되어, 죽은 첫 아이를 모티브로 한 "하얀 별을 안고 하늘을 나는 어린이"를 그렸으며, 이후 2남을(태현-야스카타, 태성-야스나리) 얻었다. 1946년 일시 원산사범학교에 미술 교사로 봉직하기도 하였다.
북한이 공산화 되자 자유로운 창작 활동에 많은 제한을 받게 되어 친구인 시인 구상(具常)의 시집 『응향(凝香)』의 표지화를 그려 두 사람이 같이 공산주의 당국으로부터 비판을 받기도 하였다. 6·25 한국전쟁이 일어나고, 유엔군이 북진하면서 그는 자유를 찾아 원산을 탈출, 제주도를 거쳐 부산에 도착하였다.
이 무렵 부인과 두 아들은 일본 동경으로 건너갔으며, 이중섭은 홀로 남아 부산·통영 등지로 전전하다가 1953년 밀항하여 가족들을 만났으나 굴욕적인 처가 신세가 싫어 다시 귀국하였고, 이후 줄곧 가족과의 재회를 염원하며 살다가 1956년 정신이상과 간장염으로 그의 나이 40세에 서울 적십자병원에서 운명하였다.
화단 활동은 부산 피난 시절 박고석(朴古石)·한묵(韓默)·이봉상(李鳳商) 등과 같이 만든 기조전(其潮展)과 신사실파에 일시 참여한 것 외에 통영·서울·대구에서의 개인전이 기록되고 있으며, 살아 있는 동안에 많은 인간적인 에피소드와 강한 개성적 작품으로 1970년대에 이르러 갖가지 회고전과 재평가 작업이 활발하게 일어났다.
1972년 현대화랑에서의 유작전과 화집 발간을 위시하여, 평전(評傳)의 간행, 일대기를 다룬 영화·연극 등이 상연되었으며, 많은 작가론이 발표되었다.
현대화랑 ‘이중섭의 사랑, 가족’전(2015.1.15 이데일리)
가족의 사랑, 희망의 서신을 전하다
“어머님과 우리 가족의 마지막 소망은 따뜻한 남쪽나라(제주도)로 돌아가 여생을 보내는 것이다.”
지금으로부터 10년 전인 2005년 3월 이중섭의 둘째 아들 태성씨는 기자에게 자신과 어머니(이중섭 미망인) 야마모토 마사코(93ㆍ한국명 이남덕) 여사의 유일한 염원을 들려준 적이 있다.
그로부터 4개월 뒤인 7월 태성씨와 마사코 여사는 한국을 찾았지만 미술계의 불미스런 일로 남편(아버지)의 조국에서 여생을 보내고자 했던 소망을 끝내 접고 일본으로 돌아갔다. 그 때 마사코 여사의 형언할 수 없는 슬픈 표정과 태성씨의 쓸쓸한 모습은 아직 눈에 선하다.
인생의 대부분을 일본에서 살아온 그들이 한국에서 여생을 보내고자 했던 동인은 무엇일까? 아마 그것은 이중섭일 게다. 더 정확히는 이중섭과 함께 한 삶, 고단하고 궁핍했지만 그 처연하고 빈 곳을 사랑으로 채우던 가장 ‘따뜻한 시절’에 대한 기억의 힘 때문이리라.
그 사랑, 기억의 힘은 식민지 청년 이중섭이 1835년 일본에 유학, 마사코를 만나면서 시작돼 2차대전 막바지인 1945년 4월 포화속에 마사코가 단신으로 현해탄을 건너 이중섭과 만나 결혼하면서 꽃을 피운다. 그러나 이어진 6ㆍ25 전쟁(1950년) 속에 가족은 고행길에 오르고 제주도에서 잠시 안정을 찾지만 이내 생활고에 시달리다 부인과 두 아들이 일본으로 가면서 이별한다. 이중섭은 오로지 떠난 가족을 그리워하며 작업하고 생활하다 지병으로 숨진다. 이중섭의 삶과 가족은 우리의 굴절된 현대사로 인해 깊은 상처를 받았지만 그 안에서 피어낸 가족애와 사랑은 더욱 빛난다.
이중섭의 이 모든 것은 오롯이 작품에 남아 있다. 일반적으로 이중섭의 작품을 거론하면 힘찬 소의 이미지가 떠오르지만 정작 그의 작품 중 상당수를 차지하고 있는 것은 사랑과 가족에 대한 내용이다. 이는 이중섭이 미술을 본격적으로 시작하고 마사코를 만나 가족을 이루며 평생 작가로 살다 숨질 때까지 일관되게 이어진다.
서울 사간동 현대화랑(대표 박명자)은 그러한 이중섭의 굴곡진 삶에 스며 있는 보석 같은 사랑과 가족의 의미를 잔잔한 감동으로 전하는 전시를 열고 있다. 새해 1월 6일부터 내달 22일까지 열리는 ‘이중섭의 사랑, 가족’전으로 국내에서 이중섭 전시는 1972년, 99년에 이어 세 번째 열리는 셈이다. 특히 이번 전시에는 뉴욕 현대미술관(MoMA)에 소장된 은지화 3점이 60년 만에 한국에 처음 공개된다. 또한 이중섭이 멀리 떨어져 있는 가족에게 보낸 미공개 편지 20여점도 함께 전시돼 총 70여점이 선보인다.
전시는 크게 5부분으로 나뉘어 일본 유학시절 글을 대신해 사랑을 전했던 엽서화, 유화, 채색화, 가족들에게 보냈던 편지화, 재료비가 없어 담뱃갑 속 은지에 새긴 은지화로 구성됐다. 결혼 전 마사코를 향한 연애 감정을 담은 엽서 그림은 그린 간결한 선묘와 데생력이 탁월하다. ‘활을 쏘는 남자’에는 마사코를 향한 이중섭의 열정이, ‘누운 여자’에는 아담과 이브에서와 같은 지순한 원초적 사랑이 읽힌다.
채색화에는 유독 아이들이 많이 등장하는데 ‘물고기와 노는 세 어린이’ ‘봄의 어린이’등에는 두 아들과 자신을 어린이화한 ‘어른 아이’이중섭이 한데 어울리는 모습이 무척 다정스럽고 밝아 보인다. 유화엔 ‘가족’그림이 많다. ‘가족과 비둘기’ ‘길 떠나는 가족’ 등등. 세상과의 불화에 시달리던 이중섭을 그나마 지탱해준 건 바로 가족이다. 그의 가족 그림들에는 헤어져 있던 가족이 다시 하나되기를 바라는 염원이 담겨 있다.
은지화는 지극히 가난했던 시절 이중섭이 담뱃갑 속 은박지에 가족에 대한 그리움을 아로새긴 것이다. 이번 전시에는 주한 미대사관 문정관이었던 아서 맥터가트가 1955년 이중섭 개인전에서 구입해 MoMA에 기증한 3점이 60년 만에 국내에 들어와 선보인다. 2점은 ‘낙원의 가족’ ‘복숭아 밭에서 노는 아이들’ 등 가족이 도원에서 행복해 하는 모습을 그렸다. 나머지 한 점은 ‘신문 보는 사람들’로 이중섭의 작품 중 드물게 옷을 입은 사람들이 신문을 보는 모습을 묘사했다.
이중섭의 미공개 편지 그림 20여 점에는 가족을 향한 간절함이 절절하게 배어 있다. 이중섭은 편지의 글 귀퉁이에 그림을 곁들였고, 그림만으로 사연을 보내기도 했다. “나의 귀중하고 유일한 천사 남덕 군. 당신만으로 하루가 가득하다오. 마음속으로 당신의 모든 것을 포옹하고 있소.” “전람회를 열어 그림을 팔아 돈과 선물을 잔뜩 사 갈 테니… 건강하게 기다리고 있어 주세요”, “더욱더 우리 네 식구 의좋게 버티어 보자”등등.
미술평론가 최석태씨는 “그늘에서 더욱 빛나는 얼굴이 이중섭과 그의 그림의 힘”이라며 “그가 우리 민족의 미술가인 까닭도 바로 이것이다”고 말했다.
현대화랑은 이번 전시의 의미와 효과를 배가시킬 수 있게 몇가지 장치를 더했다. 우선 전시실 한쪽에선 다큐멘터리 ‘이중섭의 아내-두 개의 조국, 하나의 사랑’ 축약 편집본이 상영돼 ‘가족’ ‘사랑’에 대한 감동을 더해준다. 이 영화는 이중섭의 아내 마사코 여사의 일생을 담은 다큐멘터리로 지난해 12월 13일부터 일본 전역에 상영되고 있다.
또 이중섭 네 식구가 제주에서 살았던 4.3m²(약 1.3평) 골방을 실물 크기로 재현해 전시했다. 전시실 출입구 옆 벽에는 메모판을 설치해 관람객들의 전시에 대한 감흥을 많은 사람들이 공유할 수 있게 했다.
화랑의 정성에다 이번 전시가 전하는 ‘가족’ ‘사랑’의 메시지가 잔잔한 울림을 주며 관람객의 발길이 끊이질 않고 있다. 이중섭이 시련의 시기에도 ‘희망’을 그린 것이 각박한 시대를 살아가는 현대인들에게 공감을 주며 또 다른 ‘희망’을 갖게 하고 있다. 02-2287-3591
관람을 끝내고 나오니...
어쨌거나 가슴이 먹먹했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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