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기도

고려의 마지막 왕 공양왕릉 & 최영 장군 묘

아미고 Amigo 2021. 12. 1. 14:08

2021.10.29 

공양왕(恭讓王) 왕요(王瑤)

 

고려(918∼1392. 474년)의 제34대 마지막 왕 공양왕(1345∼1394. 재위 1389∼1392. 본명 왕요)은 자신의 목숨을 부지하기 위해 처참하게 몸부림을 쳤지만 결국은 천수를 누리지 못하고 살해된 고려의 마지막 왕이 되었다.

 

죽음의 그림자는 이성계의 위화도회군(威化島回軍. 1388년)에서부터 시작되어 같은 해에 충신이자 명장이었던 최영(崔瑩. 1316∼1388) 장군이 참형됨으로써 그 모습이 확연히 드러난 거 같다.

 

사실 이런 일들이 일어나게 된 단초는 왕손(王孫)이 아닌 신돈(辛旽)의 자식이었던 제32대 우왕(禑王. 1365∼1389. 재위 1374∼1388)이 원나라와 명나라 그리고 왜(倭) 등 혼란한 주변정세 때문에 군대를 움직이는 명장 최영 장군에게 너무 많이 기댄 것에서부터 비롯된 것으로 보이며 혈통 문제도 영향을 준 것 같다.

 

 

 

 

 

 

 

 

공양왕릉(恭讓王陵)

 

공양왕은 이성계에 의해 왕위에 올라, 이성계의 주문에 따라 제32대 우왕과 제33대 창왕(昌王. 1380∼1389. 재위 1388∼1389)에게 사약을 내려 이성계의 왕도(王道)에 걸림돌을 제거해준 다음 본인도 폐위되고 공양군(恭讓君)으로 강등되어 귀양살이를 하다가 삼척에서 살해되어 이곳 고양 왕릉골에 영면하고 있다.

 

이렇듯 권력의 속성은 사실상 폭력으로, 폭력은 바로 창검이니, 그런 군대를 장악하지 못한 절대 권력은 위험하기 때문에 공양왕은 그 자리를 피하려했지만 결국은 왕위에 올라 우여곡절을 겪고 천수를 누리지 못했으니 그의 무덤은 왕릉도 아니었던 것을 조선 태종 16년에 공양왕으로 추봉되어 왕릉이 되었다.

 

방법은 조금 달라졌을지 몰라도 절대 권력의 속성은 지금도 유사하다. 우리나라의 전임 대통령 두 분은 고령임에도 불구하고 감옥에 있고 또 한 분은 퇴임 후 검찰 수사 압박을 받던 중 투신 서거하였으니, 대통령을 안했더라면 감옥에는 가지 않았을 것 같고, 더욱이 투신하지는 않았을 것 같은데, 무슨 생각을 하고 있으며 어떤 게 잘 사는 것인지 모르겠다.

 

 

 

 

 

 

 

 

공양왕과 연못

 

사료에는 공양왕이 삼척에서 살해된 것으로 되어 있는데 또 다른 자료가 있는 것인지 아니면 살해를 감추기 위한 얘기인지 연못 얘기가 나오는데, 능역 하단에 이렇게 아담한 연못이 있다.

 

공양왕을 끝으로 약 500년의 王氏 고려왕조는 막을 내리고 이성계의 전주 이씨 조선이 열림에 따라 훗날 왕조에 대한 후환을 두려워한 이성계 일파에 의해 王氏 왕족들은 여러 곳에서 살육을 당하고 발 빠른 일부는 姓氏를 全氏나 金氏 등으로 개성(改姓)하여 살아남았다는데, 영흥도의 영흥 익령군도 그 중의 하나일까?

 

공양왕릉은 삼척에도 있지만 삼척의 능은 구전에 의한 것이고 고양의 능이 기록에 있기에 고양의 능을 공양왕릉으로 보는 것 같은데, 얼마나 애절했으면 능이 두 개나 되겠는가!

 

 

 

 

 

 

 

 

공양왕의 외가(外家) 묘

 

공양왕릉 뒤에는 경계를 구분하는 목책이 있는데, 이 목책 뒤의 묘들은 공양왕의 외가(外家) 후손들의 묘라고 한다.

 

 

******************************************

 

 

황금 보기를 돌 같이 하라.

 

최영(崔瑩. 1316∼1388) 장군은 선친의 유지에 따라 청렴하고 용맹한 명장으로 정국(政局)이 불안정한 상황에서 왜(倭)의 침입이 발호하고 기울어가는 원나라와 새로 떠오르는 명나라 사이의 갈등과 전쟁 등을 모두 평정하여 고려를 지켜온 대들보였던 것 같다.

 

그러나 최영은 친원파인 기득권층이었고 신흥 맹장인 이성계(李成桂, 1335∼1408, 재위 1392∼1398)는 신진세력의 친명파로, 공양왕과 우왕 창왕 그리고 최영과 이성계의 숙명은 이성계의 권세와 함께 자랐던 것 같다.

 

 

 

 

 

 

 

 

최영 장군 묘 진입로

 

“회군(回軍)”, 이거 참 맹랑한 말이다.

고려 땅을 노략질하는 명나라 군대를 정벌하라고 출병을 명했는데 명나라를 정벌해야할 군대가 명령에 반해서 말머리를 돌려 고려 조정을 정벌하고서는 “역성혁명(易姓革命)”이라니 역시 역사는 승자의 기록이고 정의란 강자의 이익이다.

 

반역(反逆)과 쿠데타(coup d’État)는 어디에 써먹는 말인지 모르겠다.

우리 역사책에는 최영 장군도 영웅이고 이성계도 영웅이니 코미디 같기도 하지만, 그 사정이야 어렴풋이 짐작이 되는 거 아닌가.....

 

 

 

 

 

 

 

 

최영 장군 묘

 

왕을 마음대로 폐위하고 옹립하는 이성계를 제거할 생각을 가지고 있던 충신 정몽주(鄭夢周, 1337∼1392)가 사냥 중 낙마로 몸을 다친 이성계를 문병할 때에 이방원이 하여가(何如歌)”로 정몽주를 회유했지만, 정몽주는 그 유명한단심가(丹心歌)”로 거절하고 집으로 돌아가던 중 선죽교(善竹橋)에서 살해되었으니, 최영 장군이 제거된 세상은 이성계의 독무대였던 것 같다.

 

이 시기에 나오는 주요 인물들의 생몰(生沒)은 아래와 같으며, 내편과 네 편으로 나뉘어 사생결단을 했던 것 같고, 우리도 좌익과 우익 그리고 국민학교 때 청군 백군으로 나뉜 운동회를 했는데, 이런 이분법의 사고와 흑백논리는 좋은 게 아닌 거 같다.

 

최   영   1316생   1388 (귀양살이 하다가 72세에 참살)

이성계   1335생   1408 (73세)

정몽주   1337생   1392 (55세에 선죽교에서 참살)

공양왕   1345생   1394 (귀양살이 중 49세에 삼척에서 참살)

우   왕   1365생   1389 (폐위되어 24세에 사약)

이방원   1367생   1422 (조선 제3대 태종, 왕자의 난을 거쳐 왕위에 등극, 55세)

창   왕   1380생   1389 (폐위되어 9세에 사약)

 

 

 

남한에 있는 고려 왕릉은 6로, 공양왕릉(경기 고양 & 강원 삼척)과 강화도에 있는 희종의 석릉, 원덕왕후의 곤릉, 고종의 홍릉, 순경태후의 가릉 및 성평왕후의 소릉이라고 하는데, 소릉은 그 위치가 불분명하여 외포리 고분군과 가릉 옆에 있는 능내리 석실분을 소릉으로 추정하기도 한다.

 

공양왕과 최영 장군은 살아서도 죽어서도 함께 하는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