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4.27. & 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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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영루(山映樓) - 경기도 기념물 제223호
산영루는 용학사와 공덕비 등이 즐비한 중흥사권역(重興寺圈域)의 북한천(北漢川)에 있는 암반 위에 세워진 누각으로, 조선의 수많은 시인과 선비들이 찾은 명소였으며, 다산 정약용(1762-1836)과 추사 김정희(1786-1856)도 이곳을 찾았다는데, 산영루에 대한 다산의 시 한 수가 재미있다.
험한 돌길 끊어지자 높은 난간 나타나니
겨드랑이에 날개 돋쳐 날아갈 것 같구나
십여 곳 절간종소리 가을빛 저물어 가고
온 산의 누런 잎에 물소리 차가워라.
숲속에 말 매어두고얘기 꽃을 피우는데
구름 속에 만난 스님 예절도 너그럽다.
해 지자 흐릿한 구름 산빛을 가뒀는데
행주에선 술상을 올린다고 알려오네.
이 시를 쓴 이후에 다산은 귀양길에 오르지만, 시 속에 당시의 시속(時俗)을 엿볼 수 있는 내용도 있으며, 행주는 고양의 옛 지명이라고 한다.
북한산성 탐방 지원센터 & 북한산성 대서문(大西門)
탐방지원센터에서 몇 걸음 걸으면 대서문이 나오는데, 여기서부터 사적 제162호인 북한산성 권역이다.
대서문(大西門)은 북한산성의 정문으로 산성의 문 중에서 가장 낮은 위치에 있고, 1712년에 숙종이 북한산성에 행차했을 때 이 대서문을 이용했으며 문루는 1958년에 복원한 것이라 한다.
북한산성은 132년에 백제(개루왕)가 축조하여, 이후 주인의 변화와 더불어 몽골과의 격전을 치렀던 곳으로 지금 남아 있는 것들은 대부분 조선시대에 만들어진 것들이라고 한다. 그러나 백제의 축성으로부터 본다면 2000년 역사유적이다.
조선시대에는1711년(숙종 37년)에 대규모의 축성 공사를 시작하여 13개의 성문, 3개의 장대(將臺), 130칸의 행궁, 140칸의 군창, 중흥사(重興寺)를 비롯한 12개의 사찰, 26개소의 저수지 그리고 99개소의 우물 등을 만들었다고 하며, 북한산성은 사적 제162호로 지정되었다.
돌장승과 무량사(無量寺)
익살스러운 표정의 돌장승이 나오고 돌장승을 지나면 무량사가 나오는데, 무량사는 고종의 후궁인 순헌황귀비 엄씨(1854∼1911)가 이곳에 약사불좌상과 산신탱화를 모신 산신각을 짓고, 백일기도를 올려 영친왕 이은(1897∼1970)을 얻었다 하여 영험한 곳으로 알려졌다고 한다.
북한동 마을 터 & 새마을교 그리고 사찰들
위 사진은 북한산성 안에 있었던 북한동 마을의 흔적들인데, 1950년대까지도 대서문 밖으로 우마차인 달구지로 땔나무를 실어냈다고 하며, 2006년부터 철거를 하였다고 한다. 북한동 마을 위에는 많은 사찰과 사찰의 승군 등이 있었으니 북한동이 중심이 되었을 것이고 주막도 있었을 것 같다.
새마을교는 이름 자체가 시사하듯이 최근에 만들어진 다리이며, 다리를 건너서 오른쪽으로 가야 산영루와 중흥사 및 태고사를 거쳐 북한산성 행궁지로 가고, 왼쪽으로 2.6km를 가면 백운대가 나온다.
북한산에 있는 사찰 대부분은 이 북한천 계곡에 있다고 할 정도로 사찰이 많은데, 중흥사와 태고사가 있는 곳까지 우마차가 다닐 수 있는 대로가 있었을 뿐만 아니라 행궁까지 있었으니 북한산 1번 가도였던 것 같다.
법용사 쉼터 & 돌부처 입상
탐방지원센터로부터 1.9km 거리에 있는 법용사 앞의 쉼터로 대부분 이곳에서 간식을 먹고 화장실도 이용한다.
중성문(中城門)
북한산성의 정문인 대서문이 위치가 낮아 취약하다고 생각하여 중성문을 중심으로 내성을 이중으로 쌓았으며, 대서문과 중성문에 모두 수문이 있었던 것은 물을 가두었다가 수공을 하려 했던 것 같다.
노적교(露積橋)와 진국교(鎭國橋)
중성문을 지나 노적교와 진국교를 차례로 지나면 중흥사권역에 들어선다.
중흥사권역(重興寺圈域) - 북한산성에서 가장 많은 문화재가 분포되어있는 권역이다.
산영루(山映樓)
산영루는 1603년(선조 36년)에 이정구의 “유삼각산기”에 처음으로 기록으로 등장하였으며, 1925년에 홍수로 유실된 것을 2014년에 다시 옛 모습(맨 아래)대로 복원하였다고 한다.
북한승도절목(위) & 북한산성선정비군(아래)
산영루 앞에는 북한승도절목(위)이 있고 선정비(아래)들이 즐비한데, 일부는 고의로 파손된 것 같고, “북한승도절목”의 내용을 보면 승군 총지휘자인 “도총섭”의 선발과 임명을 두고 갈등이 많았던 것 같다.
승군(僧軍) 그리고 조선조의 숭유억불(崇儒抑佛), 이거 참 아이러니다.
전란이 있을 때마다 승군이 일어났거나 동원되었는데, 오월동주인지 전략적 제휴였던 것인지 아리송하다.
중흥사(重興寺)
기록에 의하면 중흥사는 12세기 초 이전에 세워진 것으로 보이며, 승군의 중심 사찰로, 승군의 총지휘자인 “도총섭”이 중흥사에 머물렀다고 한다.
대웅전과 만세루(萬歲樓) 등은 2012년에 복원되었다고 하며, 맨 아래 사진은 중흥사에서 바라본 “북한산성 행궁지”와 중흥사의 옛 모습이다.
태고사(太古寺)의 원증국사탑비 & 원증국사탑
태고종에 속하는 사찰로 1341년에 태고 보우(太古 普愚. 1301∼1382)가 중흥사의 주지로 있으면서 개인 수도처인 암자로부터 시작된 사찰이었는데 6.25 한국전쟁 때 전소된 것을 다시 복원하였다고 한다.
행궁권역(行宮圈域)과 갈림길
중흥사와 태고사로부터 시작되는 행궁권역에는 행궁은 물론 중창지(中倉址)와 호조창지(戶曺倉址)를 비롯하여 많은 유적이 산재한 북한산성의 중심부이다.
종로 평창동(平倉洞)이 큰 창고인 평창(平倉)에서 유래됐다는 것을 알 수 있으며, 행궁으로 가기 위해서는 갈림길에서 오른쪽으로 가면 조용한 오솔길이 펼쳐진다.
북한산성 행궁지(北漢山城 行宮址)
행궁지는 탐방 안내센터로부터 약 4km 거리에 있는데, 발굴조사가 진행 중인 행궁지 전체를 조망할 수 있는 곳에서 점심을 먹으며 행궁지와 옛 사진을 떠올리며 상상의 날개를 펼쳐봤다.
조선의 제19대 왕 숙종이 희빈 장씨와 사랑놀이만 한 게 아니라 굵직한 국책 사업들도 많이 한 중에 북한산성 축성까지 하면서 기분이 어땠을까 하는 생각, 그리고 김국환씨가 부른 “타타타”도 떠올랐는데 제목인 타타타(산스크리트어로 “그래 바로 그거야”) 보다는 노랫말이 재미있어서 그랬던 것 같다.
행궁의 옛 모습
궁을 연상하면 행궁이 다소 초라하게 보일지 모르겠지만, 험한 북한산 골짜기에 이런 규모의 역사(役事)를 벌였다니 놀라운 일이다. 아마도 행궁권역 초입까지는 우마차가 다닐 수 있는 길이 닦여서 여기까지는 우마차를 이용하여 건축자재를 운반했을 것으로 추측되며 지금도 자동차가 다닌다.
사진 자료까지 있으니 발굴조사가 끝나면 복원작업까지 이어질지 모르겠다.
이렇게 의젓하던 행궁이 1915년 산사태로 매몰되어 폐허가 되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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