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8.19
어제 아침엔 화사한 햇빛으로 시작하더니 석양 무렵엔 안개같은 이슬비로 변했고, 밤새도록 비와 비같은 눈이 오락가락하더니 마침내 눈보라가 몰아친다.
눈보라가 몰아치고 하지만, 계절은 봄으로 달려가고 있고, 이미 봄이 온 느낌 같기도 하다. 하지만 이런 날에 여름 풍경을 올리는 것이 참 생뚱맞은 느낌이다.
그래도, 타이틀은 유명세에 따라 "화개장터 - 남도대교 - 하천리"로 올렸지만...
내레이션은 "남도대교"로부터 시작하는 게 좋을 것 같다.
남도대교(南道大橋)
하동군 화개면에서 구례군 간전면을 바라본 모습
옛날에 시내와 강에 다리가 있었던 곳이 얼마나 있었을까 만은, 이 곳에도 당연히 다리가 없었고, 강 양안에 줄을 매서 줄을 잡고 운행했던 나룻배가 있었기에 사람까지의 왕래는 무난했지만 물류가 확대되면서 여러가지 제약이 있었는데,
모든 유통을 원활하게 해결하기 위해 결국은 이 다리가 건설된 것인데, 명칭을 두고도 설왕설래하다가 경상남도 하동군 화개면과 전라남도 구례군 간전면의 공통분모인 "남도(南道)"에 착안하여 "남도대교"가 된 것으로 알고 있다.
화개교(花開橋)
화개천이 흘러나와서 섬진강과 만나는 곳에서 동서(東西)를 연결해주는 다리인데, 화개천은 지리산으로부터 발원하여 섬진강에 이르는 하천이며, 이 계곡에는 두 냇물이 만나는 곳의 절이라는 "쌍계사(雙磎寺)"와 더불어 "불일폭포(佛日瀑布)"가 있으며,
작설차(雀舌茶)라고도 하는 자연상태의 녹차가 자라는 곳으로도 이 화개천 계곡과 인근의 화엄사(華嚴寺) 계곡이 유명하다. 녹차가 뭔지도 잘 모르던 시절에 지인들에게 작설차를 주었더니 이게 뭐냐고 해서 한참씩이나 노가리를 까며 잘난척을 했었다.
화개교와 화개천 계곡의 모습은 아래의 하천리 백사장에서 바라본 모습이며, 원래의 다리는 화개교 위에 있는데, 지금도 사용하고 있다.
화개장터(花開場터)
화개장터야 오랜 세월 있어왔지만, 우리에게 널리 알려진 것은 "조영남의 화개장터"라는 노래로, "전라도와 경상도를 가로지르는 섬진강 줄기 따라 화개 장터엔..." 하고 펼쳐지는데, 노랫말이 정말 토속적이고 정겨웠다.
그래서 이 노래가 거의 국민가요에 버금갈 정도로 널리 애창되었는데, 조영남 가수 겸 화가가 어느 날 위작 논란의 주인공이 되었다.
위작의 판단 범위와 실체적 위작여부를 떠나 그의 그림이 시작부터 끝까지 그의 손에서 매듭지어진 것은 아닌 것 같고, 그렇다면 법률적으로는(돈으로는?) 문제가 있는 거 같고 최소한 도덕적으로는 부도덕한 것 같고,
더불어 화가 나고 얄미운 것은 술집에서 팁은 10만원 내지 몇십만원은 가볍게 주었을 텐데, 그림의 완성을 도왔던 가난한 화가에게는 고작 10만원 정도의 수고비를 지불했다니, 재산가인 조영남이 그렇게 찌질한 사람이 되어버리니 갑자기 화개장터까지 이미지에 상처가 난 것 같아 화가난다.
조영남
나보다 한참이나 형님인데...
참 못난 남자 같다.
화개(花開) 아닌가,
그랬거나 저랬거나 꽃이 피어나는 장터 아닌가...
화개루(花開樓)
모방과 카피도 창조인데, 하물며 무에서 유를 창조하면 대단한 창조일 것 같은데, 그런 창조도 있고, 그 반대의 경우도 종종 있다. 어쩌면 조영남의 노래 "화개장터"와 같은 배를 탄 것인지도 모르겠다.
바로 이 "화개루"가 대표적인 케이스 중 하나로 생각되는데, 애초에 있지도 않았던 누각을 만든 것 자체가 지자체의 속이 보이는 것이고, 효용성의 면에서 건물의 실용성이 없을 뿐만 아니라 어쩌면 시장 공간의 시야를 가리는 장애물로 느껴졌다.
비쥬얼 세상이라니 본래의 컨셉이나 주변과의 조화에 대한 개념도 없이 그 자체로 뭐 좀 볼거리가 되겠다 싶으면 충분하다고 생각하는 것일까?
어쨌건 명색이 "화개시장"인데...
상호들을 보니 전라도 지명들이 많다.
뒤집어 바라보면, 찾아오는 사람들이 전라도 사람들이 더 많다는 얘기일까?
아니면 상인들 스스로의 자부심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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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개장터 주변의 지도 --- 백사장
어쩌면 길은 인간의 삶의 지도이기도 한 것 같다.
그런 면에서 바로 이곳이 격강천리(隔江千里) 아니었겠나? 그래서 "줄 나룻배" 자리에 강 양안에 줄을 연결하여 줄을 잡고 운행하는 나룻배를 운행하던 중에,
화개의 동서를 연결하는 다리가 지금의 "화개교" 윗쪽에 건설되었고, 세월이 흐르면서 화개면사무소 소재지의 혼잡과 곡선의 비효율을 감안하여 화개교가 건설된 것이며, 나머지 이야기는 "남도대교"에서 얘기했다.
백사장
내가 경험해보았던 아름다웠던 곳은 바로 화개장터 건너편에 있었던 구례 간전면 하천리(운천리)에 속했던 "섬진강 백사장"인데, 지금은 남도대교로 인해 물 흐름이 변해서 사라져버려 옛 모습을 상상하기도 어렵다.
1987년 여름의 모습인데, 내 딸아이가 3살(30개월 가까이) 때이고, 그 때는 하천리(운천리) 일대가 아름다운 백사장이었다. 옛추억을 생각하면 내 삶이 녹아들어있던 공간이 날아가버려서 가슴 아프다.
화개교와 화개 그리고 화개계곡을 배경으로 한 하천리 백사장에서의 1990년 모습이다. 이렇게나 귀업던 녀석이 어느새 5살 배기 아이의 엄마가 되었다. 아기가 엄마 되었고 엄마가 할머니 되었다.
보성강과 섬진강을 따라 곡성 죽곡과 압록에서부터 구례의 오산 사성암을 거쳐 하동 화개와 송림과 광양 망덕포까지는 속칭 내 나와바리(일본어로 알고 있는데 국어화된 것 같다.)로 많은 추억과 사연들이 서린 곳들이다.
그런 추억 등은 그런 것이고, 나는 섬진강을 따라 이어지는 구례 운조루 곡전재 화엄사 천은사 그리고 악양 평사리의 최진사댁, 쌍계사와 불일폭포, 섬진강 숭어 그리고 광양 망덕포의 강굴(벚굴) 등이 나와 내 가족들을 유혹하고 회귀하게 만드는 것들이다.
그런 물과 숲의 흐름 속에서 살다가 서울이라는 기계적 공작적 삶속에 40년 가까이 물들면서 바보가 된 게 슬프다.
행복에 자신만만한 시절이었고,
그런 자신에 대해 스스로 또 자신만만한 시절이었다.
세상엔 진리가 있다고 믿었었고,
그 진리의 종착역이 있다고 믿었었다.
지리산 피아골 삼홍소(三紅沼)까지 내 딸아이를 업고 기를 쓰고 올라갔다.
우리들만의 세상, 얼마나 아름다운가...
단풍이 붉게 물들었고, 그 단풍이 소(沼)에 물들어 소가 붉고
그 소를 바라보는 사람의 얼굴에 단풍과 소의 단풍색이 물들어 삼홍(三紅)을 완성하는 소(沼)이니 얼마나 아름다운가.
아름다운 건 생각이고, 밤이 되니 적막과 두려움이 밀려드는데,
젖먹이 아이와 아내를 데리고 간 남자는 방어의 기제가 발동되어서
방어의 본능에 따라 야전삽을 펴두고 산악칼을 오른 쪽에 펴두고 잠을 청했지만, 물소리와 짐승들의 울음소리에 잠을 편히 못 이루었다.
역시 아침은 생동한다.
동이 트기도 전에 모닥불을 피워 아내와 딸 아이의 따뜻한 아침을 준비했었다.
내가 남편이고 아빠라는 걸 느껴본 시간이기도 했었다.
지금 다시 그 상황이라면 행.불행이 아니라 그저 자연이라고 생각할 것이다.
모두가 변해가는데, 스스로 변해가는 것인지, 아니면 시간이라는 마술이 작용하는 것인지 모르겠다.
그래서 본연의 존재 문제로 자연스럽게 생각이 날아간다.
문득, 군 입대를 준비하는 나를 위해 친구들과의 마지막 여행으로 여수에서부터 해운대까지 남해안을 누볐던 친구들하고의 이별여행의 종착지인 부산에서 출발한 기차에서 만난 여학생들과 하동에서 함께 내려서 하동 송림으로 가서 야영을 하는 과정에 트러블이 터졌고,
하동 송림 백사장 일대가 소란해져서 나름 수습을 하는 동안에, 가까이 있던 사람들이 다가오며 "무슨 일이세요?" 하며 오는데, 다행히도(?) 서로 아는 얼굴들이라 "웬 일이야?"했던 추억이...
그때 처음으로 낚시와 낚이는 관계에 생각을 해봤고 또 남녀의 여러 생각도 정리해봤고, 세상이 쉽지 않다는 걸 공부했고.......
하동에 어설픈 친구가 있어서 몇 번 만나서 송림을 거닐며 얘기를 나누는 건 좋았고, 재첩국(강조개)을 먹기는 했지만, 재첩국은 인간이 아니라 말종의 야만성 같아서 씁쓰레 했었다.
그 양반은 인증사진이 있어도 갸우뚱하지만, 아무리 그래도 섬진강 하천리와 피아골 삼홍소는 잊힐리야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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