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국여행

타지마할(Taj Mahal) - 인도 아그라

아미고 Amigo 2019. 5. 14. 00:02

 

 

2019.4.10  

 

타지마할(Taj Mahal)

 

세상에는 2개의 무덤이 있다.

 

가장 애절한 무덤인 타지마할이 그 하나이고

가장 잔인한 무덤인 진시황릉이 또 다른 하나이다.

 

그 모두가 다 아시아에 있다.

 

 

 

 

 

 

인도를 대표하는 것 중의 하나인 타지마할로 가는 길은 솔찬히 번거롭다.

관광버스에서 내려, 타지마할권역을 운행하는 기가 막힐 정도의 고물차를 타고 매표소 앞에서 내려, 매표-검표-보안검색을 거쳐야 타지마할 묘역 내로 들어간다.

 

 

 

 

 

 

 

 

 

 

 

 

 

 

타지마할 약도

 

인도를 대표하는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의 하나인 타지마할은 북쪽에 있는 야무나 강의 절벽을 제외하고는 3면이 높은 담장으로 싸여진 직사각형 모양의 아주 넓은 공간을 가진 묘역이다.

서문(West Gate) 동문(East Gate) 남문(South Gate) 앞마당(Forecourt) 카와스푸르사(Khawasspuras) 사헬리 버즈(Saheli Burj) 정문(Main Gate) 짜르 박(Charbagh) 수로 다이애나 의자 타지마할(Taj Mahal) 4개의 첨탑 모스크(Mosque) 자와브(Jawab) 대리석 플랫폼 야무나 강

 

다이애나 의자는 (고)다이애나비가 이곳을 방문했을 때 앉았던 의자라는데 지금은 사라지고 없는데, 정치적인 의미 때문일 것으로 생각된다.

 

 

 

 

 

 

동문

 

타지마할 묘역은 성벽처럼 둘러쳐진 담장에 동서남북 4개의 통문이 있는데, 동서남 문은 밖으로 통하는 문이지만, 북망산을 향하는 북문은 "타지마할"로 통하는 "정문"이며, 타지마할의 북쪽을 흐르는 야무나 강이 담장을 대신한다.

 

서문

 

 

 

남문

 

 

 

정문(북문)

 

정문에 들어서면 이렇게 타지마할이 펼쳐진다.

 

 

 

 

 

 

 

타지마할(Taj Mahal)은 인도 최대의 이슬람 제국이었던 무굴 왕조의 5대 술탄 "샤 자한(1592∼1666)"이 그의 왕비 "뭄타즈 마할"을 안치한 무덤으로  타지마할은  "마할의 왕관"이라는 뜻이라고 한다.

 

 

 

 

 

왕비  "뭄타즈 마할(1593∼1631)"은 왕의 외사촌 동생으로 14살에 왕비가 되어 39살의 창창한 나이에 14번째 출산을 하다가 절명하였다니 실로 안타깝기 그지없다.

 

결혼생활 26년 동안 14명의 공주와 왕자를 생산했으니, 22개월마다 출산을 했고 왕비가 되고부터는 언제나 배 부른 세상을 살았던 것 같다.

 

 

 

 

 

나는 여자가 온전한 여자가 되는 데에는 3단계가 있다고 말한다.

 

첫째는 여자로 태어나는 것이고

둘째는 여자의 성징을 가지는 것이고

셋째는 여자의 완성인 엄마가 되는 것이다.

 

 

 

마할 & 샤 자한(자료사진)

 

당시의 시계로는 마할의 생존이 보통이었을지 모르겠지만, 지금의 시계를 대입하면 아쉬움이 많지만 그래도 마할은 행복했을 것 같다.

 

생산이 없었던 이전의 왕비들에 비해 14명의 공주와 왕자를 생산했고, 왕과 자녀들의 사랑과 존경을 받았을 뿐만 아니라, 스스로 가슴 벅차는 존재감과 자부심 속에서 눈을 감았으며, 이렇게 아름다운 무덤에 그대(샤 자한)와 함께 영면하니.....

 

 

 

 

뒤돌아본 "정문(북문)"

 

타지마할에서 뒤돌아본 정문

 

이 무덤은 매일 2만명의 인력과 1천마리의 코끼리를 동원하여 22년 동안 건축을 하여 완공했으며, 이와 같은 아름다운 건축물의 재건축을 원천봉쇄하기 위해 공사에 참여했던 사람들의 손목을 모두 잘랐다는 얘기도 있는데...

 

미화나 침소봉대도 유분수지 당시 사회의 인구수만으로도 산수가 안되는 걸, 지나친 의욕과 얄팍한 포플리즘이 타지마할 본래의 모습을 훼손하는 것 같다.

 

 

왜그랬을까.....

 

마할의 죽음으로 비탄에 빠진 왕 샤 자한은 세계사에 남는 역사적 유물인 타지마할을 남겼지만, 이 무덤을 만들기 위해 너무 많은 국고를 탕진하였다고 한다.

 

그러니 그대로 계속 가다가는 민심도 이반되어 왕권이 위험하겠다고 생각한 그의 아들 "아우랑제브"가 반란을 일으켜 아버지인 왕을 폐위하고 스스로 왕위에 올랐다고 하니 궁궐 내에서도 이미 민심이 떠났던 것 같다.

 

아이러니다.

샤 자한이 그토록 사랑했던 왕비 뭄타즈 마할과의 사이에서 태어난 아들 아우랑제브에 의해 왕위를 내려놓고 연금생활을 하다가 외롭고 쓸쓸하게 죽어갔으니...

 

이 대목에서 백제의 의자왕과 삼천궁녀 이야기가 떠오른다.

경주 출신의 김부식은 삼국사기의 백제본기에서, 삼국의 어떤 기록에도 없는 의자왕의 삼천궁녀 이야기를 만들어 나당연합군이 백제를 멸망시킨 당위성을 주장했던 것 같은데, 삼천궁녀를 둘 수 있는 궁궐이라면 자금성 보다도 더 큰 궁궐이어야 했을텐데...

 

역사는 대개 승자의 기록이기 때문에 샤 자한과 아우랑제브의 이야기 그리고 백제 의자왕과 삼천궁녀의 이야기도 역사적 사료들의 맥락을 통해 행간(行間)을 읽어내는 지혜가 필요할 것 같다.

 

 

 

타지마할 못지 않게 위압적인 정문 그리고 정문에 못지 않은 정문 뒷면의 주랑과 우리 궁궐의 "궐" 쯤에 해당할 누각 역시 아름답다.

 

 

 

 

 

 

 

 

이제는 타지마할을 제 눈에 안경으로 살펴본다.

 

이래도 저래도 건축물은 자연산물의 일부일 건축물이고,

왕, 샤 자한이 외사촌 마할을 왕비로 맞았다는 것은, 근대에 이르기까지의 왕가 혼례사 패턴의 하나인 족내혼이었다는 것이고, 왕권과 더불어 왕실의 재정이 탄탄했었다는 얘기렸다.

 

역사적으로 왕권과 재정이 빈약해서 그것을 도모해야 할 때에는 족외혼을, 그것도 수많은 토호들과 상호 볼모관계의 정략결혼이 일반적이었지 않은가.....

 

그러나 한편, 만리장성 등이 그러하였듯이 이런 대역사에 강제로 동원된 사람들이 얼마나 많았으며 인명의 사상은 또 얼마나 많았겠는가.  그러니 당대를 살아간 사람들에게는 피의 궁전이었을 수도 있을 것이다.

 

 

 

샤 자한은 이 무덤이 완성되었을 때, 이것을 바라보며 얼마나 흐믓했을까.....

지금으로부터 약 350여년 전이었는데.....

 

 

 

 

 

 

자봐브(위) & 모스크(아래)

 

타지마할을 바라보며 오른 쪽에는 자봐브가 있고, 왼쪽에는 이슬람의 모스크가 있다.

 

 

 

 

 

 

 

 

타지마할의 가까운 모습

 

고대로부터 현재는 물론 미래에 이르기까지, 인간의 내세관은 자신과 가정은 물론 사회의 공감대를 형성하는 중요한 요소의 하나로 작동하는 것 같다.

 

 

 

 

 

 

 

 

 

 

야무나 강을 제 나름 살펴보았지만 .....

특별한 매력이나 흥미는 느끼지 못했고, 기후와 강물의 오염이 손에 잡힐 것 같은 느낌이어서 스모그와 미세먼지가 가득한 그런 모습이었다.

 

동아시아에 밀집된 인구와 생산시설, 이 모두가 서로의 삶을 갉아먹는 좀비 같은 존재이며, 세계의 공장과 공해의 주범들이 대체로 아시아에 밀집되어 있으니 답답할 수 밖에...

 

 

 

 

 

 

 

 

 

 

왕과 왕비의 무덤

 

사진촬영이 안돼서 도촬을 한 셈인데, 이건 가짜고 진짜는 지하에 있다고 한다.

 

 

 

 

 

 

 

 

작은 창틈을 통해 야무나 강 쪽을 본 모습인데...

세상을 갈증나게 보는 방식이 이런 것일지도 모르겠다.

 

 

 

 

 

 

 

 

타지마할(자료사진)

 

내가 핸폰으로 찍은 사진과 달라도 너무 다르다.

마치 호수 같은 수로에 타지마할이 데칼코마니된다는 것에서부터 이런 유형의 사진들이 모두 만들어진 사진이란 얘기다.

 

일기는 물론이고, 타이밍 그리고 뽀샵까지 더해진 이런 사진의 환상을 보고 현장에서 그 모습을 찾아보려 하는 순진한 사람들도 있을 것이다.

 

속이는 건 좋은 건 아닌 거 같고...

무덤이 아무리 아름답고 영혼은 천당 만당을 갔을지라도...

 

살아서 숨쉬는 세상만은 못한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