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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월 나혜석 이야기

아미고 Amigo 2018. 8. 14. 22:45

 

당연하기도 하고 당돌하기도 한 이야기들 

 

자화상(나혜석)

 

 

정월 나혜석(晶月 羅蕙錫. 18961948) --- 시인 겸 화가

19세기와 20세기를 관통하는 한국의 근.현대사에서 나혜석씨 만큼 많은 얘깃거리를 던져주고 또 많은 사람들을 갈등하게 만드는 사람도 드믄 것 같다.

워낙 화제의 인물이어서 인터넷에 수많은 자료들이 있으므로 로맨스 중심으로 내 관점으로만 요약해볼까 한다.

 

 

 

선죽교

(출생과 학교생활)

조선조에서도 선조들이 관직에 나갔던 수원 일대의 대지주인 명문가로, 일제하에서 시흥. 용인 군수를 지냈던 나기정(1863∼1915)의 5남매 중 넷째(딸로는 둘째)로 출생.

 

우수한 성적으로 학교생활을 했고, 미술공부를 위하여 일본으로 유학하여 최승구(1892∼1917)및 이광수(1892∼1950) 등과 교우하였고 항일학생운동에도 참여하였으며, 우리나라 최초의 서양화가가 되었다.

 

 

 

 

나혜석

 

(로맨스 1)

일본 유학생활 중, 역시 일본에 유학 중이었던 최승구(1892∼∼1917)와 사랑에 빠졌으나,  최승구가 폐결핵으로 고흥 군수이던 둘째 형의 집에서 요양하다가 25살의 나이에 요절하였고, 최승구의 죽음을 사무치게 슬퍼하였던 나혜석은 김우영과 결혼하면서 최승구의 무덤에 묘비를 세워주었다니, 최승구의 요절은 안타깝지만 한 여인의 지극한 사랑을 안은 채 잠든 최승구는 그래도 행복한 남자였던 것 같다.

 

 

 

(독립운동 그리고 김우영과의 만남과 결혼)

나혜석은 1919년 3.1운동 당시 김마리아, 박인덕, 김활란 등 여성운동가들과 함께 비밀집회를 갖다가 체포되어 5개월간 옥고를 치르게 되는데, 이 때 김우영 변호사의 변론으로 무죄 석방되었으며, 이듬해에 그와 결혼한다.

 

 

 

 

나혜석과 김우영

세계일주 여행을 떠날 때의 모습이라고 한다.

 

 

(나혜석의 남편 김우영)

김우영(1886∼1958)은 교토제국대학 법학부를 졸업하고 변호사로 활동하던 중 부인과 사별하고 나혜석을 만나 재혼하는데, 나혜석의 당돌한(?) 결혼 조건을 모두 받아들이면서 결혼했다고 한다.

 

첫째, 평생 나만 사랑해 달라.

둘째, 그림 그리는 것을 방해 말라.

셋째, 시어머니와 전실 딸과 한 집에서 같이 살게 하지 말 것.

넷째, 최승구의 묘비를 세워줄 것.

 

나이 차이가 10살이었으니 다소 많은 차이가 나는 편이기는 하지만, 지금으로부터 약 100년 전의 가부장적인 사회풍속을 감안한다면 파격적인 조건이었던 것 같다.

 

첫째와 둘째는 그렇다 치더라도 셋째와 넷째, 그 중에서도 넷째 조건은 상당히 난해하다. 나혜석이 그렇게 담대하고 자신만만하며 자신을 무한 사랑하고 자기 자신에 대해 솔직했던 것인지, 아니면 또는 더불어, 언감생심 나를 소유할 생각은 꿈도 꾸지 말고 백기를 들고 투항하라는 메시지인지 참으로 난해하고 그런 조건을 받아들인 김우영 또한 대단한 남자였다는 생각이 든다.

 

 

 

 

 

무희

 

 

(결혼생활과 로맨스 2)

김우영은 최린(1878∼1958)및 장덕수(1894∼1947) 등과 함께 친일하기로 노선을 정리한 뒤 일본제국의 외교관이 되어 외교관 생활을 하던 중 나혜석과 함께 약 1년 8개월간의 세계일주 여행을 하게 되는데, 요즘 말로 풀이하자면 외교관들의 견문을 넓혀주기 위한 일본정부 차원의 해외연수 프로그램이었던 것 같다.

 

이후 김우영은 공부를 하기 위해 독일로 유학을 가게 되었고, 나혜석은 그림 공부를 계속 하기 위해 파리에 남게 되어, 김우영의 7년 선배인 최린(나혜석과는 17살 차이)에게 아내를 보살펴달라고 부탁을 하고 떠났는데, 둘은 사랑에 빠져버렸고 결과적으로 최린은 나혜석의 잠자리까지 보살피게 되었던 것 같다.

 

3.1독립운동에도 참여하였고, 독립선언문 33인 중의 한 사람이었던 최린은 13살에 결혼을 하여 가정이 있는 상태에서 나혜석과 로맨스에 빠졌으며, 이 때는 최린이 이미 친일로 변절하였던 때다.

 

요즈음에도 아이들 조기유학으로 또는 이런저런 사정으로, 연말부부, 반년부부, 월말부부 그리고 주말부부로 살면서 이러쿵 저러쿵 하는 얘기들이 더러 있는데, 지금껏 데일리부부로 살아온 내게는 역시나 난해하다. 아이들 양육과 교육도 중요하고 이런저런 사정도 중요하겠지만 결혼생활에 있어 부부생활 역시 중요한 요소의 하나이고, 배만 고픈 게 아니라 사랑도 고플 수 있기 때문이다.

 

 

 

스페인 국경


(나락으로 그리고 절규)

발 없는 소문은 조선에까지 퍼졌고, 나혜석은 김우영으로부터 이혼을 당했다.이혼 후 그 자신만만한 자신감으로 홀로서기를 노력했지만 세상은 이미 그녀를 버린 뒤였다.
1935년부터 수덕사와 해인사 등등을 전전하며 13년의 유랑생활 끝에 서울의 자혜병원에서 행려병자로 52세의 나이에 병사했다고 한다.
형제자매가 다섯씩이나 되었지만, 세상이 외면한 그녀를 그들도 외면했던 것 같다.

 

비슷한 시기에 비련의 삶을 불꽃처럼 살다 간 윤심덕과 전혜린은 스스로 삶을 포기한 반면에 나혜석은 끝까지 세상을 응시하며 살았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을 하면, 그렇게 담대하고 호탕한 여자의 손을 잡아 줄 남자 하나 없었다는 게 옹졸한 세상이었던 것 같다.

 

이 얘기에 등장하는 사람들 모두가 시쳇말로 금수저를 물고 태어난 사람들이고, 나혜석의 절규가 사단이 터지기 전이었다면 설득력이 컸을텐데 변명처럼 들리는 것도 무리는 아닐성싶다.

 

 

 

 

 

 

해인사 석탑

 

조선 남성들 보시오. 조선의 남성이란 인간들은 참으로 이상하외다. 잘나건 못나건 간에 그네들은 적실, 후실에 몇 집 살림을 하면서도 여성에게는 정조를 요구하고 있구려. 하지만, 여자도 사람이외다! 한순간 분출하는 감정에 흩뜨려지기도 하고 실수도 하는 그런 사람이외다. 남편의 아내가 되기 전에, 내 자식의 어미이기 전에 첫째로 나는 사람인 것이오. 내가 만일 당신네 같은 남성이었다면 오히려 호탕한 성품으로 여겨졌을 거외다.

(이혼고백서 中)

 

 

 

 

강변

 

정조는 도덕도 법률도 아무 것도 아니요, 오직 취미다. 밥 먹고 싶을 때 밥 먹고, 떡 먹고 싶을 때 떡 먹는 거와 같이 임의용지로 할 것이요, 결코 마음의 구속을 받을 것도 아니다. (구미만유기 中)

 

 

 

 

 

 

스페인 해수욕장

 

도덕. 윤리가 사회질서의 기본임에는 틀림이 없지만, 그것이 강자에게는 통제와 지배의 논리가 되고 약자에게는 순응과 복종의 논리가 되는 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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