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장산(雨裝山)
강서구에 있는 산으로, 기우제를 지냈던 산으로 기우제를 지내면 반드시 비가 와서 우장을 써야했다는 데서 유래된 이름이며, 검지산(劍支山), 원당산(元堂山)이라고도 부른다고 한다.
남쪽 봉우리에는 강서구민회관, 궁도장, 축구장, 테니스장 그리고 시비 등이 있으며, 북쪽
봉우리에는 새마을지도자탑이 있다.
그 유명한 매운당(梅雲堂) 이조년(李兆年)의 다정가(多情歌)
이화(梨花)에 월백하고 은한(銀漢)이 삼경인제
일지춘심(一枝春心)을 자규(子規)야 아랴마는
다정(多情)도 병인양 하여 잠 못 들어 하노라.
그리움과 사랑을 노래한 서정적인 시조 같기도 하지만 다른 의미를 읽어내기도 하는 것 같다.
이조년은 1269년에 태어나서 1343년에 74세로 돌아가셨다니 아주 장수하신 것 같다.
고려말 시대를 사신 분으로, 특이하게도 5형제의 이름이 백년(百年), 천년(千年), 만년(萬年), 억년(億年), 그리고 조년(兆年)이었다고 한다.
이억년과 이조년에게는 형제투금(兄弟投金)이라는 미담(?)이 전해지는데, 형제가 길에서 금덩이 2개를 주워서 각기 하나씩 나눠 갖고, 지금의 강서구 개화동 부근에 있었던 공화진이라는 나룻터에서 한강을 건너던 중, 동생인 이조년이 금덩이를 한강에 던져버렸다고 한다.
형인 이억년이 웬일이냐고 물으니, 형이 없었더라면 내가 2개를 다 가졌을텐데, 형 때문에 하나밖에 못가졌다는 욕심이 형제의 우애를 해치는 것 같아서 강에 던져버렸다는 것이었고, 이에 형도 금덩이를 강에 던져버렸다는 얘기다.
그래서 이 공화진 여울이 "투금탄(投金灘)"이라는 별칭을 얻게 되었고...
당시로서는 인간 본연의 도덕율과 형제애를 고양시키기 위한 얘기로, 사람들에게 하나의 표상으로써 충분히 가치가 있고 설득력이 있었을지 모르겠지만...
오늘을 사는 현대인들에게는 그렇게 들리지 않을 것 같다.
"금덩어리를 길에서 주울만큼 그렇게 금이 흔했었나?"
"두 형제가 굳이 금덩이를 강에 버리지 않고 다른 좋은 곳에 쓸 수는 없었을까?" 등등
시공을 건너뛰고 논리가 허술한 얘기 속에서 논리를 만들어내지 않을까.....
하지만 이들이 살았던 시기가 13세기로, 남녀상열지사(男女相悅之詞)를 노래한 그 유명한 쌍화점(雙花店)과 겹치는 것을 보면 당시의 자유분방하고 문란한 풍기에 대한 지식인들의 걱정의 한 단면을 엿볼 수 있을 것 같다.
이것은 우장산에 있는 것이고
공암진(투금탄)의 현장인 강서한강공원에는 조형물이 있다.
남으로 창을 내겠소(김상용)
"왜 사냐건 웃지요."
삶을 이렇게나 멋지게 표현했다니...
말로써 말 많은 인간세상에...
"가끔은 하느님도 외로워서 눈물을 흘리신다."
표현이 참 멋있다.
하긴, 뭔가를 해주겠다는 인간은 없고...
뭐든 해달라는 인간들만 가득한데다...
해주고나면 또 불평 일색이니 힘드실게다.
꽃이 지는 그림자가 창을 붉게 물들이는
것을 본 시인의 눈이 부럽다.
보이지 않으면 잊혀진다는 말은
예나 지금이나 마찬가지일까...
도시에 사는 대다수의 사람들이
감잎의 단풍을...
호칭과 관심에 대한 표현 중
이보다 적라라한 표현도 없을 것 같다.
답설야중거 / 불수호란행 / 금일아행적 / 수작후인정
지금 살아가는 내 삶의 궤적을 따라
다음 생에서도 그 길을 간다는
니체의 생각은 서산대사의 말씀에서 깨우쳤을까...
시는 아주 많이 진열되어 있지만
눈에 띄는 것들 중, 일부만 올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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