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국여행

일본 ....... 오사카,교토,나고야,아타미,하꼬네,도쿄

아미고 Amigo 2014. 1. 21. 20:51

내 생애 최초의 해외나들이였다.

거의 30년 전이었으니 그 때는 나도 팔팔했었고 세상은 만만했었다.

 

첫 연수국으로 대만(타이완)에 가서 타이페이부터 고웅까지 돌아보고, 타이페이에서 다음 행선지인 일본의 오사카(大阪)로 향했다.

 

일본에서는

오사카(大阪) - 교토(京都) - 나고야(名古屋) - 하나마끄 호수 - 아타미(熱海) - 하꼬네 오와꾸다니 - 도쿄(東京)의 순으로 난생 처음 보는 2층 버스를 타고 다녔다.

 

 

오사카(大阪)는 에도(지금의 도쿄)시대에 이미 에도및 교토와 더불어

3대 도시의 하나였으며, 바다를 접하고 있는 저지대의 항구 도시로

해발고도가 평균 5m 이하인 "물의도시"로 다리가 약 840여개나 있다고 한다.

오사카 국제공항과 간사이 국제공항이 있다.

 

 

 

 

오사카성

1583년에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건축하였는데

나중에 화재로 소실된 것을 다시 복원하였다고 한다.

 

 

 

오사카성의 EXPO 70 타임캡슐

 

 

 

 

오사카의 미나미 도돔보리

 

 

 

 

 

교토(京都)는 내륙으로, 794년에 이 곳에 새 도읍 헤이안경(平安京)을 만들어

이후 400년 간에 걸친 헤이안시대(平安時代)에 번영을 구가하다가

바쿠후(幕府) 정치의 시작과 더불어 쇠퇴하였으나 학술·문화 도시로서의

전통을 가지고 있다.

 

 

 

 

교토의 이조성(二條城)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1603년에 건립하였다고 한다.

 

 

 

 

 

 

 

나고야(名古屋)는 17세기 초에 일본을 통일한 도쿠가와 이에야(德川家康)가

나고야성(城)을 축조하면서 발달한 도시로, 제2차 세계대전 때 시가지가 소실

되었으나 전후 복구계획에 따라 재건된 도시라고 한다.

 

 

 

나고야성

 

오사카성(大阪城)·구마모토성(熊本城)과 함께 일본의 3대 성 중의 하나로,

처음에 이마가와씨(今川氏)가 쌓은 성인데 뒤에 폐허가 되어

도쿠가와 이에야스(德川家康)가 천하통일을 이룩한 후 자신의 권력 기반을

다지기 위해 1610년부터 다시 축조해 1612년 완성하였다고 한다.

 

 

 

 

나고야 교육센터

 

 

 

 

중일신문사

 

 

 

 

 

아타미온천(熱海溫泉)은 온천수가 바다에서 나오기 때문에

아타미(熱海:열해)라는 지명을 갖게 된 일본 최대의 온천 관광지로

도쿄에서 신칸센으로 약 45분 정도 걸린다.

 

 

 

아타미

 

 

 

유카타 (浴衣욕의)

기모노의 일종이라고 한다. 주로 평상복으로 사용하는 간편한 옷으로, 목욕 후나 여름에

입는다고 한다.  또 불꽃축제인 하나비나 봉오도리 등의 여름 축제에도 입는다고 한다.

목욕한 다음에 입는 유카타는 히로소데(廣袖)라고 하며, 겨드랑이 부분을 꿰매지 않는다.

유카타를 입을 때는 타비를 신지 않고 맨발로 게타를 신는다.

유카타라는 명칭은 유카타비라, 즉 목욕한 후에 몸을 닦는 수건이라는 말에서 유래되었다고 한다.

 

 

 

 

 

 

 

(일본의 목욕문화)

 

일본인들이 목욕을 즐긴다는 것은 이미 상식이 되어 있다.

일본인들이 이렇게 목욕을 즐기는 문화가 형성된 데에는 대략 다음의 3가지에서 그 근원을 찾을수 있을 것으로 생각한다.

 

첫째는, 고온다습한 기후와 주거구조의 특징인데, 일본은 우리처럼 온돌난방을 하지 않고 "다다미"라고 부르는(속에 볏짚을 담은 매트리스) 것을 바닥에 깔아 난방을 하며 집에 창문이 많다. 고온다습한 하절기에는 땀 때문에 그리고 온돌난방이 없는 동절기에는 잠자리에 들기 전에 몸을 덥히기 위해 목욕이 필요했다는 것이다.

 

둘째는, 지리적 특징으로 화산이 많아 열천(熱泉) 또한 많은 일본에서는 자연스럽게 온천욕이 일상화 된 것이 지금의 목욕문화를 이루게 된 배경으로 생각된다.

 

셋째는, 사원(절)에서의 의례절차의 하나로 목욕이 일상화 되었다는 것이다.

 

더불어 대부분의 외국인들에게 기이한 일본문화의 하나로 잘못 알려진 혼욕문화는 언제부터 그런 풍습이 있어왔는지 분명치는 않으나, 에도시대에 들어 혼욕문화가 성행했음을 알 수 있으며 개화기부터는 법령 등으로 혼욕을 금지하여 대부분 사라졌고, 이러한 목욕과 혼묙문화는 성애(性愛)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라 위의 3가지 원인에서 비롯된 것으로 보인다.

 

 

 

 

(문화의 충격)

 

북한의 두메산골이 고향인 강영훈 (전)총리께서는 어렷을 적에 읍에 나와서 일본인들이 지어놓은 2층집을 처음으로 보았을 때 경이로운 문화의 충격을 받았다고 술회하신 적이 있다. 집 위에 또 집이 있다는 것은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었다는 것이다.

 

나는 그런 문화의 충격을 일본의 아타미 온천에서 처음으로 경험하게 되었다.

호텔에서 부지런을 떨어 아침 일찍이 호텔의 대중온천으로 갔다.

욕실문을 열고 들어가려는 순간 나는 당황했다. 그럴것이 욕조안에 여자들만 3명이 있었기 때문이다. 문을 닫고 돌아나와 남탕 여탕을 다시 확인해보니 남탕은 확실히 맞고, 그 순간 일본의 혼욕문화라는 것이 떠올랐다.

 

한숨 돌리고, 몸을 대충 가리고 들어가서 샤워를 하고 나도 욕조속에 들어가 앉았는데, 시선처리가 문제였다. 

남탕과 여탕은 벽을 사이에 두고 있으며, 그 벽에 조그만 쪽문이 하나 있는데, 여자는 이 문을 통해서 남탕에 올 수 있으나 남자는 여탕에 갈 수 없는 거라고 했다.

 

유럽의 요즈음 혼욕 사우나와는 다른 느낌들이 많다.

 

 

 

 

 

하꼬네

 

 

하꼬네 - 오와꾸다니 활화산

이 곳 주변에 사는 사람들은 이 곳에서는 사람이 살 수 없다고 하여,

지고쿠(地獄 : 지옥)라 부르며 두려워했다고 한다.

 

 

 

도쿄

 

 

 

국회도서관

 

 

 

사무라이 연극관

 

 

 

민단본부

 

 

 

메이지신궁(明治神宮)

속칭 신사다.

마음이 내키지 않아 안에는 들어가지 않았다.

일행들도 대부분 그랬던 것으로 기억된다.

 

 

 

고쿄(황거 皇居) 입구

 

 

 

나리타 공항

 

그 때의 내 어린(순수한 감정으로...) 감정으로는

일본이라는 나라가 그리고 국민들이 무척이나 세련되고 깔끔한

나라이자 국민들이라는 생각이 들었고.......

 

그런 나라...  그런 국민들이 꽤나 얄미운 생각이 들었었다.

(이 게 소위 말하는 민족사관인지 모르겠다...)

우리 사회는 그 때, 아직 세련(?)되지는 않았어도.....

관용과 포용의 공동체정신이 살아 있었던 것 아닐까 하는

생각을 느꼈던 것 같다.

 

말하자면...

그런 느낌이었던 것 같다.

음식으로 치자면...

맛이 있는 것 같은데...

그 맛이 거북한 거.......

 

 

그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