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동주 시인
겨울 날씨치고는 비교적 포근한 날씨고...
해서... 백사실계곡(白沙室溪谷)의 겨울 모습은 어떨까 싶어, 백사실계곡을 찾아 보기로 했다.
경복궁역에서 부암동 쪽으로 가는 버스를 타고 윤동주 문학관에서 내렸다.
백사실계곡 가는 길에 윤동주 문학관을 들른건 아니고, 오전은 문학관을 둘러보고
점심을 먹고 오후에 백사실계곡을 돌아볼 요량으로 작정하고 갔는데...
시인이 질풍노도처럼 살고 간 짧은 세월만큼이나 문학관도 조촐했다.
문학관이라는 게, 옛날에 "청운수도가압장", 그러니까 쉽게 말해서 상수도 물탱크였던 건물을 허물지 않고 그대로 문학관으로 사용하고 있었다.
담백하다는 생각과 더불어 조금 아쉽고 안타까운 마음이 교차했었다.
최정남 우리궁궐지킴이 선생님께서 자상한 해설을 해주셨고, 다음에 동부인 해서 또는 친구들이나 지인들과 함께 올 일이 있으면 연락하라고 하시니 참으로 고맙기 그지없다.
문학관은 종로구 청운동(창의문로) 자하문(지금의 창의문) 건너편에 있다.
문학관 모습이다.
사랑도 미움도 무관심보다는 나은 것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사람이 정말로 죽는다는 것은 "세상 사람들로부터 잊혀지는 것이다."는 말처럼, 윤동주 시인은 죽었지만... 우리가 그를 기억하는 한, 그는 영원히 살아있는 것 아닐까?
문학관의 전시실에 들어서면...
시인이 28년이라는 세월을 불꽃처럼 살아간 초등학교에서부터 하늘의 별로 돌아갈 때까지를 아홉 꼭지로 전시해 두었다.
(초등학교 시절)
오줌싸개 디도
빨래줄에 걸어 논
요에다 그린 지도
지난 밤에 내 동생
오줌싸 그린 지도
꿈에 가본 엄마 계신
별나라 지돈가?
돈 벌러간 아빠 계신
만주땅 지돈가?
(중학교 시절)
이런 날
사이 좋은 정문의 두 돌기둥 끝에서
오색기와 태양기가 춤을 추는 날
금을 그은 지역의아이들이 즐거워한다.
아이들에게 하루의 건조한 학과로
해말간 권태가 깃들고
"모순" 두 자를 이해치 못하도록
머리가 단순하였구나.
이런 날에는
잃어버린 완고하던 형을
부르고 싶다.
(고등학교 시절)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
(원래는 식민지를 의미하는 "병원"이라는 제목이었는데,
주변의 권유로 제목을 바꿨다고 한다 - 잘 아는 시이므로 생략한다.)
(연희전문 시절)
별 헤는 밤
(이 시도 잘 알려진 시이므로 생략한다.)
(고뇌의 시간)
참회록
파란 녹이 낀 거울 속에 내 얼굴이 남아 있는 것은
어느 왕조의 유물이기에 이다지도 욕될까.
나는 나의 참회의 글을 한 줄에 줄이자.
만 이십사 년 일 개월을 무슨 기쁨을 바라 살아 왔던가.
내일이나 모레나 그 어느 즐거운 날에 나는 또 한 줄의 참회록을 써야 한다.
그 때 그 젊은 나이에 왜 그런 부끄런 고백을 했던가.
밤이면 밤마다 나의 거울을 손바닥으로 닦아 보자.
그러면 어느 운석 밑으로 홀로 걸어가는 슬픈 사람의 뒷모습이 거울 속에 나타나온다.
(일본 유학시절)
쉽게 씨워진 시
창밖에 밤비가 속살거려
육첩방(六疊房)은 남의 나라
시인이란 슬픈 천명인줄 알면서도
한 줄 시를 적어볼까
땀내와 사랑내 포그니 품긴
보내주신 학비봉투를 받어
대학 노트를 끼고
늙은 교수의 강의를 들으려 간다.
생각해보면 어린 때 동무를
하나, 둘, 죄다 잃어버리고
나는 무얼 바라
나는 다만, 홀로 침전하는 것일까?
인생은 살기 어렵다는데
시가 이렇게 쉽게 씨워지는 것은
부끄러운 일이다.
육첩방은 남의 나라
창밖에 밤비가 속살거리는데
등불을 밝혀 어둠을 조곰 내몰고
시대처럼 올 아츰을 기다리는 최후의 나
나는 나에게 적은 손을 내밀어
눈물과 위안으로 잡는 최초의 악수
(후쿠오카 감옥 시절)
십자가
쫓아오던 햇빛인데
지금 교회당 꼭대기
십자가에 걸리었습니다.
첨탑(尖塔)이 저렇게도 높은데
어떻게 올라갈 수 있을까요
종소리도 들려오지 않는데
휘파람이나 불며 서성거리다가,
괴로웠던 사나이,
행복한 예수 그리스도에게 처럼
십자가가 허락된다면
모가지를 드리우고
꽃처럼 피어나는 피를
어두워 가는 하늘 밑에
조용히 흘리겠습니다.
(죽음)
새로운 길
내를 건너서 숲으로
고개를 넘어서 마을로 어제도 가고 오늘도 갈
나의 길 새로운 길 민들레가 피고 까치가 날고
아가씨가 지나고 바람이 일고 나의 길은 언제나 새로운 길
오늘도... 내일도... 내를 건너서 숲으로
고개를 넘어서 마을로
(별이 되다)
서시(序詩)
죽는 날까지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럼이 없기를,
잎새에 이는 바람에도
나는 괴로워했다.
별을 노래하는 마음으로
모든 죽어가는 것을 사랑해야지.
그리고 나한테 주어진 길을
걸어가야겠다.
오늘 밤에도 별이 바람에 스치운다.
물탱크 상태인 문학관이다.
마지막인 제3전시실에서는 약 10분 정도의 동영상을 보여준다.
제2전시실에 들어서면 마치 감옥같은 느낌이 들었고, 위로 열린 하늘이 윤동주 시인의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 그리고 "별 헤는 밤"이 저절로 떠오르게 만든다.
이 대목에서 나도 시 한 수 만들어야겠다.
인생
세상은 살아 볼 만하다.
한 번은 살아 볼 만하다.
나머지는 눈 감은 다음에
생각해볼 일이다.
이런 시들이 고백하는듯한 독백으로 흘러나오는,
윤동주를 그린 영화 "동주"를 한번 더 보았으면 좋겠다.
윤동주 문학관은 입장료가 없다.
문학관 왼편으로는 인왕산 줄기의 "시인의 능선"이 있다.
시인의 능선에 올라서면 윤동주 시인의 "서시"가 있고
광화문 방향과 부암동 및 북한산 족두리봉에서부터 문수봉까지가 한 눈에 들어온다.
시인의 언덕에 있는 "서시"
시인의 언덕에서 바라본 북악산
시인의 언덕에서 바라본 북한산
북악산 창의문에서 바라본 시인의 언덕
인왕산 쪽
(네이버 자료 : 장규식 중앙대 역사학과 교수 집필)
윤동주는 독립투쟁의 일선에서 장렬하게 산화한 투사도 아니었고, 당대에 이름이 널리 알려진 시인도 아니었다. 그러나 인간을 떠나서 도를 닦는다는 것은 한낱 오락에 불과하고, 공부나 시도 생활이 되어야 한다며, 자신의 시와 삶을 일치시키려 “잎새에 이는 바람에도” 괴로워했던 그의 시 정신은 어느 투사 못지 않게 치열한 바가 있었다. “별을 노래하는 마음으로 / 모든 죽어가는 것들을 사랑해야지 / 그리고 나한테 주어진 길을 / 걸어가야겠다”는 <서시>의 구절처럼, 그는 모진 풍파 속에서도 독립한 나라를 희망하는 마음으로 죽음의 나락에 빠진 민족을 사랑했고, 자신한테 주어진 길을 걸어가며 한 몸을 민족의 제단에 제물로 바쳤다.
기독교 신앙과 민족 정신의 마을 만주 명동촌에서 자라나
윤동주(尹東柱,1917.12.30~1945.2.16)는 식민지의 암울한 현실 속에서 민족에 대한 사랑과 독립의 절절한 소망을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에 견주어 노래한 민족시인이다. 시인 윤동주는 1917년 12월 30일중국 길림성(吉林省) 화룡현(和龍縣) 명동촌(明東村)에서 아버지 윤영석(尹永錫, 1895-1962)과 어머니 김용(金龍, 1891-1947) 사이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그가 태어난 명동촌은 1899년 2월 함경북도 종성 출신의 문병규(文秉奎), 김약연(金躍淵), 남종구(南宗九)와 회령 출신의 김하규(金河奎) 네 가문의 식솔 140여명이 집단 이주해 세운 한인마을로, 북간도 한인 이주사에 이정표를 마련한 곳이었다.
윤동주 집안의 북간도 이주는 증조부 되는 윤재옥(尹在玉) 때로 거슬러 올라간다. 윤재옥이 43세 때인 1886년 부인과 4남 1녀의 어린 자녀들을 이끌고 본래 살던 함북 종성군 동풍면 상장포를 떠나 두만강 건너편 자동(紫洞. 현재의 자동(子洞))에 처음 자리잡으면서, 윤동주 집안의 북간도 생활은 시작되었다. 북간도 이민 초창기에 자동으로 이주한 윤재옥은 부지런히 농토를 일구어 주변에서 부자 소리를 들을 정도로 자수성가하였다. 그리고 1900년 조부인 윤하현(尹夏鉉, 1875-1947) 때 명동촌으로 이사하여 명동 한인마을의 한 식구가 되었다.
윤동주가 태어나 어린 시절을 보낸 북간도 명동촌은 일찍부터 신학문과 기독교를 받아들인 선구자의 마을이었다. 북간도 최초의 신교육기관은 1906년 10월경 이상설(李相卨) 등이 용정(龍井)에 설립한 서전서숙(瑞甸書塾)이었는데, 이듬해 4월 이상설이 헤이그 특사로 떠난 지 몇 개월 안돼 문을 닫고, 그 뒤를 이은 것이 명동촌의 명동서숙(明東書塾)이었다. 명동서숙은 앞서 김하규, 김약연, 남위언이 한학을 가르치기 위해 세운 세 군데 서재를 하나로 합치고, 서전서숙 교사 출신의 박무림(朴茂林)을 초대 숙장으로 모셔와 1908년 4월 문을 열었다. 명동서숙으로 출발한 명동학교는 1909년 신민회 회원 정재면(鄭載冕)이 교사로 부임해 교장 김약연, 교감 정재면의 체제를 갖추면서 신학문과 민족의식을 가르치는 신교육기관으로 굳건히 자리를 잡았다. 명동학교에서 정재면은 학생들에게 신학문뿐만 아니라 성경을 가르치고 함께 예배를 드렸다. 그리하여 부임 첫 해에 명동교회가 설립되고, 이후 마을사람 거의 모두가 기독교로 개종하는 커다란 변화가 있게 되었다. 1910년 명동학교에 중학교 과정이 만들어지고, 이듬해 여학교가 설립되면서 명동촌은 북간도 민족교육의 거점으로 떠올랐다.
윤동주의 아버지 윤영석이 15세 나이로 명동학교에 들어가 신학문을 배우기 시작한 것은 정재면이 교사로 부임해 마을에 새로운 변화를 몰고 온 1909년이었다. 이듬해 명동학교 교장 김약연의 이복 누이동생인 김용과 결혼한 윤영석은 1913년 3월 문재린 등과 함께 중국 북경으로 유학을 떠났다 돌아와 모교인 명동학교에서 교편을 잡았다. 윤동주가 태어날 당시 그의 집안은 명동촌에서도 벼농사를 하는 몇 집 가운데 하나로 넉넉한 가세를 자랑하였다. 그가 태어난 집은 학교촌 입구 자그마한 과수원에 둘러싸인 큰 기와집으로 가랑나무가 우거진 야산기슭 교회당 앞쪽에 자리하고 있었다.
북간도 민족교육의 거점인 명동소학교 입학…손수 <새 명동>이라는 잡지 펴내
윤동주는 사방이 산으로 둘러싸인 아늑한 큰 마을 명동촌에서 28년 생애의 절반인 14년을 보내며 아름다운 자연을 벗삼아 시인으로서의 감수성을 키워나갔다. 이와 관련해 한가지 눈 여겨 볼 것은 그의 어린 시절 아명이다. 윤동주의 아명은 ‘해처럼 빛나라’는 뜻으로 아버지가 지어준 해환(海煥)이었다. 아버지 윤영석은 자식들 이름에 ‘해’ ‘달’ ‘별’을 차례로 붙여, 윤동주의 아우인 일주에게는 달환(達煥), 그 밑에 갓난애 때 죽은 동생에게는 별환이라는 아명을 지어주었다. 윤동주라는 이름 석자를 세상에 널리 알린 시집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는 이렇게 그의 아명 속에서 이미 잉태되고 있었던 것이다. 더불어 윤동주의 성장과정에서 빼놓을 수 없는 것이 기독교의 영향이다. 명동교회의 장로로 도량이 넓었던 할아버지 윤하현과 집안의 기독교적 분위기 속에서 윤동주는 유아세례를 받고 어릴 적부터 하나님사랑과 이웃사랑의 기독교정신을 배우며 자랐다. 또 1912년 결성된 북간도 최초의 한인자치단체 간민회의 회장을 역임하며 한인사회의 정신적 지주 역할을 한 외삼촌 김약연의 영향 아래 일찍부터 민족의식에 눈뜰 수 있었다.
이처럼 아름다운 자연과 기독교신앙, 그리고 민족주의가 삼위일체로 어우러진 기름진 토양 속에서 풍요롭게 자라난 시인 윤동주는 1925년 만 8세의 나이로 명동소학교에 입학하였다. 3.1운동 이후 북간도 대한국민회가 조직되고, 국경선 일대의 봉오동 청산리 등지에서 치열한 독립전쟁이 벌어지는 과정에서 명동학교 출신들이 보여준 활약상에 잘 나타나 있듯이, 그가 다닌 명동학교는 수많은 민족지사를 배출한 북간도 민족교육의 거점이었다. 그래서 1920년 10월 ‘간도 대토벌’에 나선 일본군에 의해 1918년 신축된 양옥 벽돌교사가 불타는 수난을 겪기도 하였다. 불탄 교사는 1922년 원상복구가 되었지만, 윤동주가 입학할 무렵 명동학교의 형편은 썩 좋지 않았다. 1920년 캐나다 장로회 선교부가 북간도 교통의 요지인 용정에 은진중학교, 명신여학교를 세워 교육의 중심이 용정으로 이동한 데다, 갑자년 가뭄으로 인한 경영난까지 겹쳐 윤동주가 입학하던 1925년 명동중학교가 문을 닫은 때문이다. 명동소학교도 1929년 교회학교에서 공립으로 넘어갔다.
명동소학교 시절의 윤동주는 유순하고 눈물 많은 소년이었다. 동기동창으로 윤동주 집에서 석 달 먼저 태어난 동갑내기 고종사촌 송몽규(宋夢奎)와 김약연의 조카로 윤동주와 외사촌간이었던 김정우, 그리고 문재린 목사의 아들인 문익환 등이 있었는데, 모두 문학 방면에 남다른 재능을 보였다. 서울에서 발행되던 <<아이생활>> <<어린이>> 등의 잡지를 구독하며 문학소년의 꿈을 키우던 윤동주와 동기들은 5학년 때인 1929년 손수 원고를 모아 편집해서 <<새 명동>>이라는 잡지를 등사판으로 발간하기도 하였다. 1931년 3월 명동소학교를 졸업한 윤동주는 송몽규 등과 함께 대랍자(大拉子)에 있는 중국인 소학교 6학년에 편입해 1년을 더 다녔다. 대랍자는 명동에서 동쪽으로 10리쯤 떨어진 화룡현 현청 소재지였는데, 윤동주와 송몽규는 명동에서 대랍자까지 십 리 길을 날마다 걸어서 통학했다고 한다.
만주 용정 은진중학교에선 축구 선수로, 잡지 편집자로, 웅변 1등상 수상자로 활기찬 생활
윤동주가 대랍자 소학교에 다니던 1931년 늦가을 윤동주의 집은 명동에서 북쪽으로 30리쯤 떨어진 해란강 하류의 소도시 용정으로 이사했다. 만주사변이 일어나고 무장단의 출몰이 잦아지자 농토와 집을 소작인에게 맡기고 신변안전이 보장되는 도회지로 이주한 것이다. 용정은 한인들이 모여 사는 거점도시로 일본 간도 총영사관이 위치해 있었다. 중국 관청이 밀집한 연길(延吉)과 더불어 북간도의 양대 거점을 이루었던 용정에서 윤동주의 아버지 윤영석은 인쇄소를 차리고 도회지에서의 새로운 삶을 시작하였다. 그러나 이내 실패하고 그 뒤 포목점을 비롯한 다른 사업에도 손을 대어 보았지만 부진을 면치 못했다고 한다. 집도 과수원이 딸린 큰 기와집에서 용정가 제2구 1동 36호의 20평 정도되는 초가집으로 바뀌어 옹색한 생활을 해야 했다.
용정에서 윤동주는 1932년 4월 명동소학교 동창인 송몽규, 문익환과 함께 은진중학교에 진학하였다. 16세 때의 일인데, 이름을 아명인 해환 대신 ‘윤동주’로 쓰기 시작한 것도 이 때부터였다. 은진중학교는 ‘영국덕’이라 불린 용정 동남쪽 구릉에 위치한 미션스쿨로 명신여학교, 제창병원과 함께 캐나다 장로회 선교부에서 운영하던 학교였다. 윤동주가 은진중학교에 입학한 1932년은 앞서 만주사변을 일으킨 일본이 청조(淸朝)의 마지막 황제 푸이[溥儀]를 명목상의 통치자로 내세워 괴뢰국 만주국을 세운 해였다. 그리하여 북간도는 만주국의 영토가 되었고, 그 실권은 일본 관동군 사령관이 장악하였다. 그러나 ‘영국덕’의 학교와 병원들은 일종의 치외법권적 혜택을 받아 일본의 간섭으로부터 어느 정도 자유로울 수 있었다.
동생 윤일주의 회고에 따르면 은진 중학교에서 윤동주는 축구선수로 뛰기도 하고, 교내 잡지를 내느라 밤늦게까지 등사 글씨를 쓰기도 하고, 또 옷맵시를 내느라 혼자 재봉틀을 돌리기도 하면서 활기찬 학창생활을 보냈다. 교내 웅변대회에 나가 1등 상을 받기도 하고, 문학적 취향에 걸맞지 않게 기하학에 흥미를 보이기도 했다고 한다. 자신이 지은 시에 날짜를 적어 보관하며 작품활동에 새로운 전기를 마련한 것도 이 무렵부터였다. ‘1934년 12월 24일’이라는 날짜가 적혀 있는 <초한대>를 비롯한 세 편의 시가 그것인데, 여기서 빼놓을 수 없는 것이 역사와 한문을 가르치던 명희조 선생에게서 받은 감화였다. 명 선생은 학생들에게 불굴의 독립의지와 치열한 역사의식을 일깨워주는 한편으로, 중국 군관학교 등에 입교를 주선하기도 했다. <초한대>에 나오는 “암흑이 창구멍으로 도망한 / 나의 방에 풍긴 / 제물의 위대한 향내를 맛보노라”는 시 구절은 그 같은 가르침에 대한 나름의 응답이었다. 민족의 제단에 바쳐진 ‘깨끗한 제물’의 위대한 향내를 맛보던 윤동주 자신 또한 뒤에 그 제물로 바쳐졌으니, 시인의 범상치 않은 예지를 읽을 수 있다.
정지용 시에 심취해 쉬운 말로 진솔한 감정을 표현하는 새로운 시 세계 열어
1935년 봄 고종사촌 송몽규가 낙양군관학교 한인반 2기생으로 입교하기 위해 중국으로 떠나고, 문익환이 상급학교 진학에 대비해 5년제인 평양 숭실중학교로 편입해 가자, 은진중학교 4학년에 진급한 윤동주는 집안 어른들을 설득해 그 해 여름 숭실중학교 가을학기 편입시험을 보았다. 그러나 뜻밖에도 한 학년 아래인 3학년으로의 편입자격밖에 얻지 못하는 좌절을 맛보아야 했다. 1935년 9월 숭실중학교 3학년에 편입한 윤동주는 객지생활 7개월 동안 시 10편, 동시 5편 해서 무려 15편의 시를 쏟아냈다. 숭실중 학생청년회에서 발행하던 <<숭실활천>>(1935. 10)에 실린 <공상>은 그의 시 가운데 최초로 활자화된 작품이었다. 이 무렵 윤동주는 정지용(鄭芝溶)의 시에 심취해 쉬운 말로 진솔한 감정을 표현하는 새로운 시세계를 열어나갔다. 1935년 12월에 쓴 <조개 껍질>을 시작으로 1938년 연희전문 1학년 때까지 계속된 그의 동시 쓰기는 그러한 변화를 보여주는 하나의 사례였다.
그런데 윤동주의 숭실중학교 생활은 오래가지 못했다. 1936년 1월 일제 총독부 당국이 신사참배 명령을 거부했다는 이유로 윤산온(尹山溫, George S. McCune) 선교사를 교장 직에서 파면하자 일어난 학생들의 항의 시위로 학교가 무기휴교에 들어간 때문이었다. 1936년 3월 문익환과 함께 용정으로 돌아온 윤동주는 용정에서 광명학원(光明學院) 중학부 4학년에 편입하였다. “솥에서 뛰어내려 숯불에 내려앉은 격”이라는 문익환의 회고처럼 그들이 편입한 광명학원은 대륙낭인 출신의 일본인이 경영하던 친일계 학교였다. 그럼에도 그러한 선택을 한 것은 상급학교 진학시의 편의를 고려한 때문으로 보인다. 광명중학에 재학하던 2년 동안 윤동주는 동시에 더욱 몰두하여 연길에서 발행되던 월간잡지 <<카톨릭소년>>에 모두 5편의 동시를 발표하였다.
연희전문에 입학하여 민족현실에 눈 떠…발악적인 일제의 광기를 고뇌로 승화, 시 속에
녹여
1938년 2월 광명중학을 졸업한 윤동주는 의과 진학을 고집하는 아버지의 만류를 뿌리치고 고종사촌 송몽규와 함께 연희전문 문과에 입학하였다. 송몽규는 앞서 군관학교에 입교하기 위해 중국으로 갔다 1936년 4월 제남에서 체포 압송되어 본적지인 함북 웅기경찰서에서 조사를 받고 석방된 전력이 있었다. 1937년 4월 대성중학교 4학년에 편입한 그는 이듬해 학교를 마치고 연희전문 문과 별과시험에 합격하여 윤동주와 다시 동문수학하는 사이가 되었다.
연희전문에서 윤동주는 최현배 교수의 조선어 강의와 손진태 교수의 역사 강의를 들으며 민족문화의 소중함을 재확인했고, 이양하 교수의 문학 강의를 들으며 자신의 문학관을 정립해 나갔다. 연희전문에서의 4년간은 윤동주 나름의 시세계가 영글어간 시기였다. 그런데 그것은 참담한 민족의 현실에 눈뜨는 과정이었고, 거기에 맞서 자신의 시 세계를 만들어가는 처절한 몸부림의 과정이었다. 연희전문 1?2학년 방학 때 고향에 들려 누이 혜원과 동생 일주에게 들려주었다는 태극기의 모양과 무궁화와 애국가, 기미독립만세와 광주학생운동 등에 대한 이야기가 이 무렵 그가 가진 역사의식의 단면을 보여준다.
윤동주가 연희전문에 입학한 1938년은 일제가 국가총동원법을 조선에도 적용해 한민족 전체를 전시총동원체제의 수렁으로 몰아넣던 때였다. 때문에 그의 고뇌와 번민은 깊어갈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연희전문의 기숙사를 나와 하숙생활을 시작한 2학년 때부터 동시 쓰기를 아예 그만두었다. 1939년 한 해 동안 그가 쓴 시는 6편에 불과했는데, 그나마도 9월에 가서야 쓴 것이 대부분이었다. 이 때 쓴 <자화상>에는 전쟁에 광분한 일본 군국주의가 단말마적 발악을 하는 속에서 식민지의 지식인이 겪어야 했던 고뇌와 갈등이 짙게 배어 있고, <투르게네프의 언덕>에는 기만적인 싸구려 이웃 사랑에 대한 날카로운 풍자가 담겨있어 당시 그의 내면풍경을 엿볼 수 있게 한다.
이후 윤동주는 1940년 12월까지 1년 이상 절필을 한다. 1940년 12월경에 쓴 <팔복>의 “슬퍼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 저희가 영원히 슬플 것이오”라는 시 구절처럼, 이 기간에 그는 민족의 처절한 수난에도 아무런 응답 없이 침묵을 지키는 신에게 대들었다. 1939년 가을 용정 정안구(精安區) 제창로(濟昌路) 1-20호, 캐나다 선교부 경내 경치 좋은 언덕에 세워진 큰 집으로 집안이 이사하고 나서 방학 때 집을 찾은 윤동주에게 예전에 보았던 신앙의 열성을 찾을 수 없었다는 동생 윤일주의 회고처럼 이 무렵 그는 자신의 기독교 신앙에 대해서도 회의를 품었다.
이런 오랜 고뇌와 번민의 터널을 지나 윤동주는 연희전문 졸업반이 되는 1941년 그 모든 내적인 방황과 자신을 짓눌렀던 역사의 무게를 시로 승화시키기 시작하였다. “나 아직 여기 호흡이 남아있소”(<무서운 시간>, 1941. 2)라고 자신이 살아있음을 다시금 확인하며, 나라 잃어 <간판 없는 거리>의 “모퉁이마다 / 자애로운 헌 와사등에 / 불을 켜놓고” 어진 사람 사람들의 손목을 잡고 보듬는 따뜻한 민족 사랑을 시로 녹여 나갔다. 졸업을 앞둔 그 해 11월 윤동주는 그 때까지 써놓은 시중에서 18편을 뽑고 여기에 <서시>를 붙여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라는 제목의 시집을 엮었다. 그는 자신의 시집 원고를 3부 필사해 1부는 자신이 갖고, 1부는 이양하 교수에게, 또 1부는 함께 하숙하던 후배 정병욱에게 주었다. 1부를 이양하 교수에게 바친 것은 출판을 주선해달라는 것이었는데, 그에 대한 이 교수의 답변은 출판을 보류하라는 것이었다. 일제 관헌의 검열을 통과할 수 없을뿐더러 신변에 위험도 따를 수 있다는 판단에서였던 듯하다. 그리하여 그의 첫 시집 출판은 해방 이후로 미루어지게 되었다.
일본유학 후 민족운동했다는 이유로 투옥…일제의 정체 모를 주사 맞으며 피골 상접하여
타계
1941년 12월 태평양전쟁 발발로 앞당겨진 학사일정에 따라 연희전문 문과를 졸업한 윤동주는 1942년 3월 일본으로 건너가 도쿄 릿쿄대학[立?大?] 문학부 영문과에 선과로 입학하였다. 함께 일본 유학 길에 오른 고종사촌 단짝 송몽규는 교토제국대학[京都帝國大學] 사학과에 선과로 입학하였다. 때문에 두 사람은 서로 떨어진 채 유학생활을 시작해야 했다. 윤동주가 진학한 릿쿄대학은 성공회에서 경영하는 기독교계 학교였다. <쉽게 씨워진 시>(1942. 6)의 “육첩방은 남의 나라 / 창밖에 밤비가 속살거리는데”라는 구절에 나와 있듯이, 유학 초기 윤동주는 이국 땅에서 적잖이 향수병에 시달렸다. 그래서인지 릿쿄대학에 진학한 지 한 학기만인 그 해 10월 윤동주는 단짝친구 송몽규가 있는 쿄토의 도지샤대학[同志社大學] 영문과로 전입학을 한다. 도지샤대학은 윤동주가 가장 좋아한 시인 정지용이 다닌 학교로, 일본 조합교회에서 경영하는 기독교계 학교였다. 전시체제하의 살벌한 분위기 속에서도 윤동주는 도지샤의 자유로운 학풍을 호흡하고, 송몽규를 비롯한 벗들과 어울리며 한결 안정된 유학생활을 보낼 수 있었다.
그러던 1943년 7월 윤동주는 방학을 맞아 고향으로 돌아갈 준비를 하던 중에 송몽규 등과 함께 일본 특고경찰에 체포되었다. 중국 군관학교 입교 전력 때문에 ‘요시찰인’으로 일본 경찰의 감시를 받던 송몽규와 더불어 조선인 유학생을 모아놓고 조선의 독립과 민족문화의 수호를 선동했다는 죄목이었다. 특고경찰은 여기에 ‘재쿄토 조선인 학생 민족주의 그룹사건’이라는 이름을 붙였다. 윤동주와 송몽규는 1944년 3월과 4월 쿄토지방재판소에서 치안유지법 위반으로 각각 징역 2년의 형을 선고 받고, 후쿠오카형무소로 이감되었다. 그리고 1년 뒤인 1945년 2월 16일 원인 불명의 사인으로 후쿠오카형무소에서 29세의 짧지만 굵은 생을 마감하였다. 윤동주의 시신을 수습하기 위해 아버지 윤영석과 당숙 윤영춘이 후쿠오카 형무소에 도착해 송몽규를 면회했을 때, 송몽규는 피골이 상접한 모습으로 감옥에서 정체 불명의 주사(마루타?)를 놓아 이 모양이 되었다는 증언을 했다. 윤동주의 죽음이 ‘생체실험’ 때문이 아닌가 하는 의혹을 갖게 하는 대목이었다. 그 같은 증언을 한 송몽규 또한 20일 남짓 지난 3월 7일 윤동주의 뒤를 따라 옥중 순국하였다.
윤동주의 유해는 3월 6일 문재린 목사의 집례로 북간도 용정 동산의 중앙장로교회 묘지에 안장되었다. 그 해 6월 그의 무덤 앞에는 집안 사람들의 정성으로 ‘시인 윤동주지묘’라는 비석이 세워졌다. 윤동주의 유시는 해방 후 연희전문 시절 절친한 벗이었던 강처중이 자신이 보관하고 있던 유고와 후배 정병욱이 가지고 있던 필사본 시집 등 31편의 시를 모아 1948년 1월 정지용의 서문과 강처중의 발문을 붙인 시집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를 정음사에서 출간하면서 세상에 널리 알려졌다. 1968년 11월에 유작 <서시>가 새겨진 <윤동주 시비>가 모교인 연세대 교정에 건립되었다.
정부는 선생의 공훈을 기려 1990년 8월 15일 대한민국 건국훈장 독립장을 수여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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