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족과 민족주의는 언제 생겼나
- 강철구 이화여대 교수 -
▶ 전근대 시기 민족의 중요성
근대주의자들은 민족이나 민족주의가 중세시대에 존재했을 가능성을 대체로 부인한다. 그것을 18세기 말 이후 근대의 산물로 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전근대 시기에 민족이나 민족주의 비슷한 것이 있더라도 그 의미를 매우 과소 평가한다.
따라서 근대주의를 비판하기 위해서는 전근대 시기에 민족이나 민족주의가 존재했다는 것을 증명하는 것이 긴요하다. 만약 단 몇 개의 민족이나 민족주의만 존재했다 하더라도 그것이 근대주의적 해석의 기초를 위협할 수 있기 때문이다.
전근대 민족이나 민족주의의 존재는 비유럽지역의 민족과 민족주의를 설명하는 데도 매우 중요하다. 민족의 존재를 서양만이 아니라 인류사의 보편적인 현상으로 설명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렇게 되면 비유럽지역의 민족주의도 서양으로부터의 수입 이데올로기라는 딱지를 떼고 어느 정도 나름의 정당성을 확보할 가능성을 갖는다. 즉 19세기 말이나 20세기에 서양에서 받아들였으므로 그 민족들은 인위성을 가질 수 밖에 없다는 주장을 반박할 수 있는 것이다.
전근대 시기에 민족이나 민족감정이 존재할 수 없었다는 주장은 1960, 70년대만 해도 민족주의 연구의 가장 중요한 인물로 생각되던 한스 콘에게서 비롯했다. 그가 1944년에 낸 <민족주의의 이념>에서 중세 시대에는 종교적, 정치적 보편주의 때문에 민족의식이 발전할 수 없었다고 주장한 것이다. 중세인들은 물리적으로나 정신적으로 제한된 공간 안에서만 생활했으므로 기껏해야 지역 공동체의 감각만을 느꼈다는 것이다.
그도 중세 말에 민족적 국가가 형성되기 시작했고 후대에 민족주의가 발전하기 위한 첫 기초가 마련되었다는 사실은 인정했으나 그 이상은 아니다. 대부분의 근대주의자들은 그의 이런 관점을 받아들였다.
그러나 민족주의를 연구하는 대부분의 사회과학자들이 중세 시대를 제대로 평가하지 않는 진짜 이유는 중세에 접근하기가 어렵기 때문이다. 전문적인 역사학 훈련을 받지 않았으므로 거기에 접근하기를 두려워할 뿐 아니라 수고스러운 작업을 회피하려 하는 것이다. 그러면서도 독단적인 주장을 하는 경향이 있으나 이는 옳은 태도는 아니다.
중세사가들은 대체로 중세시대에도 민족이나 민족감정이 존재했다는 사실을 인정한다. 이것은 요한 호이징하나 마르크 블로크 같은 20세기 전반 중세사의 대가들뿐 아니라 현재의 많은 중세사가들도 그렇다.
근대주의자들 가운데 앤소니 스미스가 전근대 민족의 존재에 대해 비교적 설득력 있는 주장을 하는 것은 그가 역사적인 접근을 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겔너의 수제자라고 할 스미스의 이런 접근은 근대주의자들 사이에서는 거의 예외적인 현상에 속한다.
☞ 내 생각 : 유럽을 중심으로 한 이야기이고 동양에서는 중세 이전부터 부족과 민족의 인식이 있었던 것 아닐까...
▶ 중세시대 서유럽의 민족과 민족주의
서유럽에서 민족의 기원은 10세기 이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잉글랜드에서는 이미 8세기에 잉글랜드인(gens Anglorum)라는 표현이 사용되었는데 이것은 5세기 이후 영국섬으로 이주해 온 앵글, 색슨, 쥬트 등 여러 게르만 종족들이 원주민들과 함께 공동의 관습과 법, 생활양식을 발전시켰기 때문으로 보인다.
그리하여 9세기의 앨프렛대왕 때에는 왕을 '잉글릿쉬(잉글랜드인)의 왕'으로 불렀다. 그 땅에 사는 사람들을 잉글릿쉬로, 그들이 사는 땅을 잉글랜드로 불렀기 때문이다. 이런 의미에서 잉글랜드는 유럽에서 가장 먼저 정치적 통일성과 민족적 정체성을 보여 주는 나라의 하나라고 할 수 있다.
1066년의 노르만 정복 이후에는 유럽에서 가장 강력한 중앙집권적 봉건체제를 수립했다. 그것은 정복자 윌리엄과 그 계승자들이 과거의 앵글로-색슨적 전통을 받아들이고 토착 엘리트들을 그 통치체제 속에 잘 통합했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중앙집권적이고 응집력이 있으며 효율적인 국가체제를 만들 수 있었기 때문이다.
이렇게 집권적 국가가 민족 공동체 형성에 중요한 역할을 했으나 보통법, 중세의회인 파러먼트, 그리고 영어의 사용(1363년에 파러먼트의 개회연설에서 영어가 공식 언어로 처음 사용되었다)도 역시 중요했다. 민족적 정체성은 14세기에 중반에 시작되어 한 세기나 이어진 프랑스와의 백년전쟁(1337-1453)으로 더 강화되었다.
그리하여 로마 카톨릭의 콘스탄츠 공의회(1414-1418)에 참석한 잉글랜드 대표단은 "민족이 다른 사람들과 혈연이나 관습, 언어에서 구분되는 사람들로 이해되든 말든, 또 민족이 프랑스 민족의 영토와 마찬가지로 영토로 이해되든 말든 잉글랜드 민족은 진정한 민족이다"라고 주장하고 있다. 오늘날 민족 개념에서 중요하게 취급되는 혈통, 관습, 언어, 영토 같은 요소가 다 망라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당시의 민족은 아직 잉글랜드인 전체를 포괄하는 것은 아니었다. 대략 전체 인구의 5% 정도인 교육받은 엘리트 집단만이 민족적 정체성을 가졌던 것으로 보인다. 또 14세기 말과 15세기에 나타나는 많은 애국적인 글들에서 민족으로서의 잉글랜드인은 국왕과, 또 조국(patria)은 왕국(regnum)과 연결되어 논의되었다. 그 점에서 당시의 민족과 민족주의의 구심점은 왕과 왕국이었고 그 민족주의는 아직 대중적 지반을 갖고 있지는 않았다.
유럽대륙에서는 프랑크 왕국의 분해가 중세왕국이 등장하는 중요한 기점이 되었다. 카롤링왕조의 프랑크왕국이 843년의 베르덩 조약으로 동, 서, 중프랑크 왕국으로 나뉘며 각 지역에서 독자적인 중세왕국의 기초가 마련되기 때문이다.
프랑스지역에서는 987년에 카페왕조가 카롤링왕가를 대체하였으나 초기에는 왕권이 매우 미약하여 프랑스인 전체의 구심점이 될 수 없었다. 그리하여 많은 대영주들이 계속 독자적인 세력을 형성했다. 또 브레타뉴, 노르망디, 가스코뉴, 플랑드르 같이 종족적으로, 언어적으로 이질적인 지역들도 남아 있었다.
13세기 초의 필립2세 시기부터 왕권이 강화되고 영주들의 영지를 빼앗으며 왕령지도 점차 확대되었다. 그리고 이 왕령지들에서는 보다 효율적인 중앙집권적 행정이 이루어졌다. 왕령지는 14세기에 프랑스왕국이 다스리는 백성이 약 2천만 명에, 그 면적은 20만 제곱킬로 이상에 달할 정도로 확대되었다.
그리하여 13세기부터 프랑스왕국 또는 Francia라는 표현이 사용되었고 왕과 왕국에 대한 충성심이 생겨났다. 그래서 프랑스 민족이 이 시기부터 형성된 것으로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다. 13세기 중반에 프랑스 법학자들이 유럽의 보편권력으로서의 신성로마제국황제의 권위를 부인한 것은 당연한 결과였다.
언어, 문화, 영토에 따라 국가가 나누어져야 한다는 생각은 1324년에, 이탈리아 출신인 마르실리우스가 쓴 <평화의 옹호자(Defensor Pacis)>라는 책에서도 잘 표현되고 있다. 이 시기에 나타나는 각 민족들의 분화과정을 반영하는 것일 것이다.
프랑스의 민족적 정체성은 영국과의 백년전쟁을 통해 더 강해졌다. 또 이탈리아인들과 14세기에 벌인 문화논쟁도 그에 기여했다. 페트라르카가 로마를 기독교와 문화의 중심지로 주장한 데 대해 프랑스인들은 문화의 중심지가 이미 로마에서 파리로 옮겨졌다고 반박하고 나선 것이다. 15세기에는 프랑스내의 오키탄어나 브레타뉴어, 바스크어, 플랑드르어 등 다른 언어에 대한 불어의 지위 상승과 결합하며 민족문화라는 생각도 등장했다.
15세기 후반의 Robert Gaguin이라는 사람의 글을 보면 당시의 민족적 정체성의 성격을 잘 알 수 있다. 그는 프랑스(France)를 조국(Patria)이라고 부르며 조국에 대한 사랑, 프랑스의 영광과 명예가 그로 하여금 글을 쓰게 한다고 말한다. 또 프랑스의 영토, 역사, 민족성과 관련해 열렬한 민족감정을 토로하고 있다.
이런 것들을 보면 1500년이면 프랑스지역에도 잉글랜드보다는 못해도 민족적 정체성이 분명히 나타난 것으로 생각된다. 물론 그것은 아직은 좁은 엘리트 집단에 한한 것으로 생각된다.
여기에서 잉글랜드와 프랑스만을 다룬 것은 두 민족의 규모나 후대에 미친 영향력 때문이다. 그러나 해스팅스(A.Hastings)같은 학자는 서유럽 대부분의 주된 민족들이 15세기까지는 성립한 것으로 본다. 그리고 그것들과 근대의 민족들과의 관계는 너무 밀접해서 그 상관관계는 결코 우연적이 아니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민족과 민족주의의 출현에 더 중요한 시기는 18세기까지의 근대 초 시기이다.
▶ 근대 초 잉글랜드의 민족 형성과 민족주의
근대 초 민족형성과정에서 중요한 역할을 한 것은 종교이다. 유럽은 16세기 초에 마르틴 루터에 의해 종교개혁이 시작되며 커다란 내적 갈등의 시대로 접어들었다. 유럽사회가 신교와 구교로 갈라져 서로 경쟁했기 때문이다.
이것은 각 나라에서 국내적으로 큰 정치, 사회적 갈등을 불러왔을 뿐 아니라 국제적으로도 마찬가지이다. 그래서 16, 17세기에 서유럽에서는 잉글랜드와 스코틀랜드, 스페인, 프랑스 사이에 지속적인 불화가 생겨났다. 신교 국가와 구교 국가 사이, 또 잉글랜드와 스코틀랜드에서는 신교 국가 사이에서도 갈등이 벌어졌기 때문이다.
또 17세기 전반에 독일 지역에서는 30년전쟁이라는 대규모의 국제적 종교전쟁까지 벌어졌는데 여기에는 독일 외에, 프랑스, 스페인, 덴마크, 스웨덴 등 여러 나라들이 포함되었다.
이 종교적 갈등은 근대 초 각 나라의 민족과 민족의식의 성장에 상당히 중요한 역할을 했다. 이는 잉글랜드에서 가장 뚜렷하다. 이미 1520-30년대에 종교개혁을 둘러싼 논쟁이 벌어지며 로마 카톨릭으로부터의 분리가 시작되었고 1534년 수장령에 의해 헨리 8세가 앵글리칸 처치(영국 국교회)의 기초를 마련한 후에는 로마교황 및 카톨릭국가인 스페인과의 대립이 노골화했다.
그리하여 이 시기에 런던 거주 외국인 수공업자에 대한 폭동을 비롯해 외국인에 대한 적대감이 강하게 나타난다. 그런 감정은 John Bale이나 Roger Ascham의 글에서 잘 볼 수 있다. 또 문화적으로도 14세기 후반 사람으로서 영어로 처음 제대로 된 문학작품을 쓴 초서의 글이 편집, 출간 되는 등 민족 문화를 추구하는 경향이 나타난다.
여기에서 중요한 역할을 한 것이 많은 영어 번역판 성경이나 기도서들, 성경주해서들이다. 이것들이 민족의식을 고양하는데 공헌했다. 그리고 성경의 번역 과정에서 라틴어의 'natio'가 'nacyon'이나 'nacion'으로, 나중에는 'nation'으로 고정되었다. 이렇게 이 시기에 유럽 각 나라에서 영어를 비롯하여, 라틴어가 아닌 자국어(vernacular)가 사용되기 시작한 것은 민족의식의 발전에서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그리하여 1533년에 헨리 8세는 자신의 선조들이 '진정한 민족'을 만들었다고 자랑스럽게 이야기하고 있다. 또 그의 딸인 엘리자베스 여왕(치세 1558-1603) 때에 오면 왕과 민족은 더 긴밀하게 결합하고 있다. 특히 1588년 스페인 무적함대와의 전쟁과 그 승리는 잉글랜드의 대부분 지역에 잉글랜드 민족의 감각을 퍼뜨리는데 기여했다.
엘리자베스 시대에는 민족 문화에 대한 관심이 갑자기 고조되었다. 그래서 잉글랜드 역사와 잉글랜드적 생활방식, 잉글랜드의 땅이나 강 등 잉글랜드적인 모든 것이 관심의 대상이 되었고 새로이 조명을 받았다. 그리고 거기에서 나오는 애국적인 열정이 시나 소설, 희곡(섹스피어를 포함하여) 등으로 표현되었다.
여기에 참여한 저자들이나 학자들 가운데에는 귀족 출신만이 아니라 평민 출신들도 많았다. 그리고 이들은 자신들이 민족 문화의 건설자라는 사실을 잘 인식하고 있었다. 16세기 말과 17세기 초의 이런 민족문화적 경향의 폭발은 전례 없는 일이었다.
그리하여 민족은 점차 잉글랜드의 주권을 가진 '인민(pepole)'이라는 의미를 갖게 되었으며 조국(country)이나 국가(empire)라는 단어도 대개 비슷한 의미로 사용되었다. empire는 로마교황이나 신성로마제국 황제 같은 보편권력에 의존하지 않는 독립적인 권력이라는 의미이다.
이렇게 대략 1600년경이면 잉글랜드에서는 민족의식과 민족 정체성이 분명히 나타나고, 민족은 자유롭고 평등한 개인의 공동체로 이해되었다. 그래서 리아 그린펠드 같은 학자는 잉글랜드에서는 이 시기까지는 민족이 탄생했다고 주장한다.
17세기에 가면 영국혁명(1642-1646)이 민족과 민족의식의 성장을 한 단계 더 진전시켰다. 영국혁명은 스튜어트 왕조에 들어와 찰스 1세의 전제가 엘리자베스가 이룩한 잉글랜드인의 통합을 깸으로써 비롯된 것이다.
이에 의회가 반기를 들고 나서며 전국 방방곡곡이 왕당파와 의회파로 갈라져 싸우는 내전으로 발전했고, 결국 의회파의 승리로 찰스1세가 처형당하는 불상사가 벌어졌다. 이 혁명기는 영국사에서 정치적으로 가장 뚜렷한 백가쟁명의 시기이다. 수많은 정치이론들이 나타나고 경쟁했으며 수많은 사람들이 혁명과정에서 직접 정치를 경험했다.
그 과정에서 민족의식은 더 넓은 지역으로 또 더 하층계급으로까지 확산될 수 있었으며 그와 함께 민족의식 자체에도 큰 변화가 생겨났다. 그것은 지금까지 민족의 구심점으로 존재해 온 왕이 처형당해 사라졌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이제 민족과 관련된 문제는 종교나 왕의 권력과 분리되어 논의되지 않을 수 없었다. 민족이 제 1차적 충성의 대상이 된 것이다. 민족이 그 자신의 힘만으로 설 수 있게 되었으므로 - 종교나 왕권 같은- 그것을 정당화하기 위한 다른 요소는 더 이상 불필요해졌다.
18세기가 되면 민족이라는 말은 영국뿐 아니라 프랑스와 유럽 다른 나라들에서도 일상적으로 사용하는 단어가 되었다. 그리고 17세기부터 시작된 식민지 경쟁은 영국과 프랑스 두 나라 사람들의 민족의식을 강화시키고 민족주의를 발전시키는데 매우 중요한 역할을 했다.
그 중에서도 특히 중요했던 것이 18세기 중반의 7년 전쟁(1756-1763)이다. 두 나라 모두 전쟁에 대해 자국민들의 전폭적인 지지를 얻으려 노력했으므로 전쟁 과정에서 인쇄물에 의한 선전전이 치열하게 전개되었다.
또 두 나라에서 1750, 60년대의 전쟁문학은 이 전쟁을 왕실이나 종교 사이의 전쟁이 아니라 화해할 수 없는 두 민족 사이의 전쟁으로 묘사했다. 그 과정에서 자연히 민족감정이 고조되었다. 그리고 이 시기에는 민족이라는 단어 외에 조국(patrie), 애국자(patriot), 애국주의(patriotism) 같은 단어들이 함께 일반적으로 사용되었다.
애국주의라는 단어에는 고대적 전통에서 비롯하는 특유의 뜻이 포함되어 있으므로(이것은 뒤에 설명할 것이다) 그것을 반드시 민족주의와 등치시키기는 어려우나 그 안에 민족주의적 성격이 강하게 들어 있는 것도 사실이다. 그러므로 이 무렵이면 두 나라 모두에서 민족주의가 분명히 나타난다고 할 수 있다. 민족주의라는 단어는 1790년대부터나 쓰이기 시작한다.
▶ 근대 초 프랑스의 민족형성과 민족주의
15세기 말 프랑스인의 정체성은 '가장 기독교적인' 프랑스왕의 백성이라는 점, 프랑스어를 말하고 쓰는 것, 프랑스 영토, 살리 법, 고대로부터의 문화적 전통, 프랑스 정치제도에 대한 자부심 같은 것에 있었다. 그리고 그 핵심은 무엇보다도 왕 개인이었다.
이런 추세는 16세기 전반에도 계속되었다. 그래서 프랑스왕이 카톨릭교회의 '큰 아들'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점차 로마교회로부터의 독립성을 추구해 나갔다. 그리고 그것은 카톨릭의 1516년 볼로냐 공의회가 프랑스왕을 명목으로는 아니라 해도 실질적으로 갈리칸교회의 수장으로 인정함으로써 어느 정도 달성되었다.
16세기 전반에는 왕의 중앙집권도 강화되었다. 이는 프랑소아 1세가 시작한 관직이나 귀족 칭호의 판매 때문이다. 그래서 귀족의 권력이 약화되며 전문 관료집단이 생겨나기 시작했다. 귀족들은 이를 싫어했으나 막을 수는 없었다. 그리하여 국가(etat)라는 단어도 그 이전의 '신분(身分)'이라는 뜻에서 근대적인 의미의 '정부'나 '정치영역'으로 점차 바뀌어 갔다.
1560년대에 이런 추세에 제동이 걸렸다. 신, 구교도 사이의 유그노 전쟁(1562-1598) 때문이다. 종교개혁 이후 프랑스에는 유그노로 불린 칼뱅 교도들이 점점 늘어났으며 1562년에 는 그 교회가 약 2천 개를 헤아릴 정도로 확대되었다.
그러자 이에 대항하기 위해 1560년대 초부터 카톨릭연맹이 지방 단위에서 생기기 시작했고 1576년에 전국적인 카톨릭연맹이 조직되었다. 이런 상황에서 1559년에 국왕인 앙리 2세가 어린 아들을 남기고 죽음으로써 혼란이 시작되었다.
이미 1560년이면 귀족이나, 삼부회의 제3신분은 중앙집권화와, 이탈리아 전쟁으로 인한 경제적 곤란에 대해 왕에게 불만을 토로하고 있었다. 이것이 유그노에 대한 적대감과 결합하며 30여년에 걸친 유그노 전쟁이 벌어진 것이다.
이 종교전쟁으로 프랑스인들은 1572년의 바톨로뮤 대학살을 포함하여 큰 고통을 겪었다. 그럼에도 카톨릭과 유그노의 두 세력은 모두 왕을 사악한 무리들로부터 지킨다는 명분을 내세웠을 뿐 왕을 공격하지는 않았다.
이 전쟁은 두 세력의 타협으로 끝났다. 왕권이 약화된 상황에서 왕이 카톨릭 편만을 들 수도 없었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유그노인 나바르공 앙리 3세가 1589년에 카톨릭으로 개종한 뒤 앙리 4세로 왕위에 오르고 그가 1598년에 낭트 칙령으로 유그노에게 관용을 베풂으로써 분란은 가라앉았다.
이때 앙리 4세는 분열된 민심을 하나로 모으기 위해 '나는 프랑스인으로서의 너희들에게 부탁한다. -- 나는 신앙을 가진 사람들이 나의 왕국에서 평화롭게 살기를 바란다. 그러나 그것은 그가 신앙을 가졌기 때문이 아니라 똑같이 나의, 그리고 프랑스왕의 충실한 종복이기 때문이다. -- 우리는 모두 프랑스인이며 같은 나라의 동료-시민들이다"라고 말했다. 왕이 프랑스인으로서의 정체성을 분명히 밝히고 있는 것이다.
17세기에 들어오며 프랑스에서는 절대왕정이 만들어지기 시작한다. 그것은 종교전쟁 가운데에서 고통을 겪은 프랑스인들이 왕의 강력한 권력을 원했기 때문이다. 이는 왕권신수설에 의존했는데 왕권신수설은 1588년에 Pierre de Belloy의 <왕의 권위>라는 글에서 처음 나타난다.
이 이론에 의하면 모든 권력은 왕에게서 나오며 백성에게는 복종 외에 다른 권리는 없었다. 정당한 통치자는 정의로우므로 왕에 대해 저항하는 것은 이론적으로 정당화될 수 없었던 것이다. 그리고 왕은 신으로부터 직접 권위를 부여받으므로 왕권에 저항하는 것은 십계명과 신의 명령에 저항하는 것으로 간주되었다.
왕권신수설은 그 후 한 세기반 동안 강력한 힘을 행사하며 프랑스 절대왕정 성립에 중요한 역할을 했다. 그러나 왕권신수설은 역설적이지만 결과적으로는 왕권을 파괴하고 민족정체성을 강화하는 데 기여했다.
그것은 왕권신수설이 신에게 의존했으나 그때의 신은 탈카톨릭화한 신이었기 때문이다. 이렇게 그 신성이 카톨릭으로부터 분리되어 추상화됨으로써 프랑스 왕의 권위가 세속성 위에 서게 된 것이다. 그리하여 17세기에 들어오면 프랑스인의 정체성은 점차 종교로부터 떠나 정치로 옮겨가게 된다.
이는 루이 13세의 섭정으로서 국가이성을 추구했던 리슐리외 추기경 하에서 분명히 나타난다. 또 루이 14세(재위 1643-1715)시기에 가면 교황이나 예수조차 군주권의 우월성에 도전할 수 없을 정도가 되었다. 그리하여 여전히 왕이 민족적 정체성의 중심을 차지할 수 있었다.
1715년에 귀족계급을 대표하는 파리 고등법원은 '전체 국가는 그의 안에 있으며 인민의 의지는 그의 의지 안에 있다'고 언명했는데 이는 왕이 최고 충성의 대상이고 신성함의 구현이며 개인화된 국가라는 점을 인정하는 말이었다.
이것은 17세기에 유럽국가들의 절대주의 체제하에서, 공화국에 대한 사랑과 공동의 자유에 대한 사랑으로 인식되었던 고대로부터 내려온 공화주의적 애국주의가 쇠퇴하고 그것이 국가나 군주에 대한 사랑으로 대치된 것과 흐름을 같이 한다. 조국(patria)이 반드시 공화국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었고, 애국주의(patriotism)가 공화국에 대한 사랑이 아니라 왕과 국가에 대한 충성으로 바뀐 것이다.
그러나 1750년경부터 이런 사정이 바뀌게 된다. 그것은 두 가지 요인 때문이다. 하나는 이 시기에 민족의 주체를 둘러싼 다툼이 벌어졌기 때문이다. 그래서 왕과 귀족이 서로가 민족을 대변한다고 주장하고 나섰다.
루이 15세가 친정을 하기까지 섭정(1715-22)이었던 오를레앙 공작은 절대왕정 하에서 크게 성장한 국가기구를 고위 귀족의 통제 하에 집어넣음으로써 왕권을 약화시켰다. 그리하여 과거에 스스로를, 왕권을 제약하는 불가결한 힘으로 간주해 왔던 고등법원들이 다시 전통적인 힘을 어느 정도 회복하게 되었다.
왕권에 비판적인 귀족들은 자신들을 민족과 동일시했다. 그리고 AD 5세기 이래 그들이 간직해 왔다고 믿은, 군주의 행위를 견제하거나 무효화할 수 있는 법적인 권리를 주장했고 그것을 민족의 권리로 포장했다. 그리하여 1730년대에는 고등법원을 민족의 '원로원'으로 부르는 사람들도 등장했다.
이에 대해 군주주의자들은 프랑스 '민족'을 부인하지는 않았으나 민족은 군주의 개인에 의해 표현되어야 한다고 반박했다. 그럼에도 이런 주장은 이미 잘 먹혀들어가지 않았다. 1766년에 루이 15세가 고등법원들에 대해 그들이 '민족의 기관(organ)을 대표하고, 민족의 자유와 이익, 권리의 보호자인 것처럼 가장하는 것은 잘못이며 반대로 민족의 권리와 이익은 - 일부 사람들이 그것을 군주와 분리시키려고 하지만 - 필연적으로 나에게 있다'고 선언한 것은 이런 상황에 대한 분노의 표출이다. 이미 왕이 민족의 구심점이었던 시기는 지난 것이다.
다른 하나의 요인은 영국과의 경쟁이다. 특히 여기에서는 7년전쟁(1756-63)에서의 패배가 매우 중요한 역할을 했다. 프랑스는 루이 14세 이후에 유럽에서의 지도권을 점차 상실했으나 이제 아메리카와 인도에서 영국에게 패배함으로써 제국의 꿈이 무너졌기 때문이다.
이리하여 이 시기에 불붙은 민족주의에는 영국에 대한 원한과 적개심이 큰 역할을 했다. 루소, 마블리, 디드로, 돌바흐, 마라 같은 지식인들이 모두 반영적인 태도를 취했는데 특히 루소가 그렇다. 프랑스가 미국독립전쟁에 참전한 것에도 반영감정은 중요한 역할을 했다.
이는 참전 프랑스군의 사령관이었던 라파예트 장군이 '내가 아메리카의 대의에 참여한 것은 나의 조국에 대한 사랑, 그 적에게 굴욕을 주려는 나의 욕구' 때문이라고 말한 데에서도 잘 알 수 있다.
1765년에 코메디 프랑세즈에서 상연된 '깔레의 포위'라는 애국적 연극은 대중들의 큰 호응을 받았다. 또 이 시기의 언론들은 반영적인 태도와 함께 애국심을 매우 강조했고 대중들은 이에 열렬히 반응했다. 이렇게 1770, 80년대의 프랑스는 민족적 감정이 매우 고조되고 사회 전반적으로도 상당히 확산된 상태에 있었다.
이런 감정과 의식은 1789년의 프랑스혁명에 가서 새로운 전기를 맞이한다. 대중성이 훨씬 커지며 더 이상 왕이나 귀족이 민족의 구심점 역할을 할 수 없게 되는 것이다. 그리하여 대중적 민족주의의 시대가 열린다. 혁명 속에서의 이런 변화를 살펴보자.
강철구 이화여대 교수 ( inkyu@pressian.com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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