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흄과 퐁파두르

아미고 Amigo 2008. 7. 23. 19:23

 

 

 

파리의 어느 연회장에서 흄과 퐁파두루 부인이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퐁파두루 부인은 뚱뚱하고 못생기고 고집스럽지만 학식이 풍부한 이 스코틀랜드인의 후원자였다.

 

"흄 선생님, 지난번에 제게 주신 책은 잘 읽었습니다.
하지만, 제 머리로는 이해할 수 없는 말들이 너무 많아 이렇게 몇 가지 적어왔습니다.
시간이 허락되신다면 저의 궁금증을 좀 풀어 주실 수 있겠습니까?"

 

퐁파두루 부인이 종이 쪽지를 펴며 그렇게 말하자 흄은 고개를 살짝 숙이며 미소를 띠었다.

 

"물론입니다. 제 책에 대해서 궁금한 점이 있으시면 주저하지 마시고 질문해주십시오.
성심 성의껏 대답해 드리겠습니다."

 

흄은 최대한 친절한 말투로 퐁파두루 부인에게 대답했다.
그녀의 후원이 없었다면 아마 흄은 지금처럼 파리의 귀족사회에서 최고의 대접을 받는 처지가 되지 못했을 것이다. 파리의 귀족사회에서 그녀의 영향력은 가히 절대적이었기 때문이다.
퐁파두루 부인이 물었다.


"흄 선생님 제가 책을 읽다 보니 선생님께서 형이상학을 학문이 아니라고 생각하고 계시던데 제가 옳게 본 것인가요?"

 

 

"예 옳게 보셨습니다."

 

"그러면 왜 선생님께서는 형이상학은 학문이 아니라고 생각하시는지요?"

 

"'형이상학'이라 함은 물질세계와 다른 '관념의 세계'를 다루고 있는 것인데, 사실 '물질세계가 없는 관념의 세계'는 있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어째서 그렇습니까?"

 

"관념은 본래 '감각'에서 오는 까닭이지요. 만약 우리의 '몸'이 없다면 우리는 어디에서 관념을 얻을 수 있겠습니까? 우리의 몸이 없이는 관념이 결코 있을 수 없듯이 물질세계가 없는 관념이란 생길 수도 없는 것이지요"

 

"그러면 관념은 어떤 과정을 통해서 생겨나는 것입니까?"

 

"'경험의 과정'에서 '감각기관'에 하나의 인상이 찍혀지면 그것이 감각기관에 의해 다시 재생되게 되는데 그 '재생된 내용'을 '관념'이라고 합니다. 이러한 관념은 서로 연관을 맺으면서 '연합'을 형성하고
그러한 연합이 우리에게는 복잡한 관념으로 나타나게 되는 것이지요"

 

퐁파두루 부인이 고개를 끄덕이며 다시 물었다.
"그러면 관념이 연합하는 데엔 어떤 법칙이 있습니까?"

 

흄이 대답했다.
"관념의 연합에는 세 가지 법칙이 있는데 그 첫째는, '비슷함의 법칙' 즉 어떤 비슷한 것을 봄으로써 이루어지는 것을 말하고
둘째는, '접촉의 법칙'으로 어떤 하나의 사물을 접함으로써 주위에 있는 다른 것들에게로 관념이 옮겨가는 것을 말하며,셋째는, '인과의 법칙' 즉 어떤 '반복되는 경험'을 통하여 그 '결과를 예측'하는 것을 말합니다."

 

"그러니까 그 세 가지 법칙을 통해서 우리의 관념이 여러 가지 형태로 드러난다는 뜻이지요?"

 

"그렇습니다."

 

"관념이 그렇게 경험을 통해서만 생긴다면 진리라는 것은 없겠네요?
우리는 지금까지 관념이 진리에서 얻어지는 것이라고 알고 있었는데 말이에요"

 

"그렇다고 '진리'가 없지는 않습니다.
다만 종래처럼 '진리'를 '형이상학'이나 '신의 세계'에서 찾지 않을 뿐이지요.
오히려 모든 것을 '감각'에 의존할 때 '학문과 진리'는 훨씬 분명해집니다.

진리에는 '이성의 진리'와 '사실의 진리'가 있습니다.
'이성의 진리'는 생각을 통해서 얻어내는데 '관념의 관계'라고 할 수 있지요.
이를테면 기하학, 대수학, 산술학, 등의 수학적인 진리가 이에 속합니다.
이같은 진리는 그야말로 사고작용이 없다면 얻어낼 수 없는 것들입니다.

 

그러나 '사실의 진리'는 이것과 다릅니다.
'사실의 진리'는 인간의 '생각'과는 관계없이 그저 우리에 의해 '경험'되는 것들이지요.
우리가 땅에 대해서 생각하지 않는다고 땅이 없어지지 않고, 또 우리가 태양에 대해서 생각하지 않는다고 해서 태양이 없는 것은 아니지요.
이와 같이 '사실의 진리'란 우리 앞에 있는 사실 그대로를 일컫는 것입니다."

 

이 대화에서 보듯이 흄은 학문을 철저하게 '경험적인 세계'에 묶어 두고 있다.
그리고 그는 형이상학을 '미신의 일종'이라고 말하면서 형이상학에 관한 내용을 기록하고 있는 모든 책들을 불태워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는 형이상학이 학문을 혼란스럽게 한다고 말한다.
인간의 오성, 즉 감각이 다가갈 수 없는 세계를 학문으로 끌어들이는 것은 인간의 허영심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 때문에 그는 철학에서 형이상학을 완전히 제거해버렸다.

 

 

흄은 관념의 복잡성을 설명하기 위해서 '관념의 연합'이라는 표현을 쓰고 있다.
관념의 연합이란 말 그대로 '관념의 덩어리'를 말한다.

'관념'이 '감각의 소산'이기에 '관념의 실체'는 '관념의 연합' 즉 '심리학적인 소산'이다.
다시 말해 '실체'라는 것은 단지 '심리학적인 개념'일 뿐이지 '실재'하는 것은 아니라는 설명이다.
이러한 논리를 세우는 과정에서 그는 종래의 '인과론'을 뒤집는다.
헤라클레이토스에서 라이프니츠에 이르기까지의 인과론은 '원인 속에는 반드시 결과가 포함되어 있다' 는 명제가 절대적이었다.
그러나 흄은 이러한 명제를 거부한다. 그는 '결과'가 '원인'으로부터 오지 않는다고 주장한다.
다시 말해 '특정한 결과'는 '특정한 원인'으로부터 비롯되지 않고, 또 '특정한 원인'은 '특정한 결과'만을 낳지 않는다는 뜻이다.

 

예컨대 '불을 피우면 빵을 구울 수 있다.'
하지만 불을 피워서 빵을 구울 수도 있겠지만 집을 태울 수도 있다.
또 불을 피워서 자신의 옷을 태우거나, 또 불을 피웠지만 빵을 굽지 못할 수도 있다.
즉, 어떤 하나의 원인이 어떤 결과를 낳을지는 아무도 모른다는 뜻이다.
흄은 이처럼 '결과'는 '개연적으로 발생'한다고 생각하고 있다.
결과를 개연성으로 몰고 가는 것은 곧 원인이 결과를 낳는 것이 아니라 '존재'가 '결과'를 낳고,
'경험'을 통해서만 그 '결과'를 알 수 있다는 논리를 전개시키기 위함이다.
이처럼 인과론에 의존하고 있는 과학에 대하여 흄은 회의적이다.


물론 모든 '경험의 획일성'에 대해서도 또한 모든 '물리적인 법칙'에 대해서도 그는 '회의적 입장'을 보인다. 그는 오직 '현상'들만 인정한다.
때문에 결과적으로 벌어져서 '경험된 현상' 이외엔 아무 것도 그를 설득시키지 못한다.

 

 

그는 이러한 관념에서 도덕과 윤리, 종교 등에 대해 설명한다.
그에게 있어 '도덕'은 '경험' 없이는 성립될 수 없다.


숱한 '경험의 반복'을 통해서 어떤 행동이 개인에게 '이익'이 되는가 하는 '심리적인 판단'이 서면 도덕은 자연스럽게 형성된다. 왜냐하면 도덕은 개인에게 '유리'하게 작용되는 '행동들의 집합'이기 때문이다.

 

 

'윤리' 역시 이러한 경향을 좇아가는 경향이 있다.
이익이란 좋게 느껴지는 것을 말하는데 윤리는 바로 이것을 좇는 것일 뿐이다.
따라서 그의 윤리관에 있어서 중요한 것은 '느낌', 즉 '감성'이다.

 

'종교'와 관련해서는 '학문'이 '종교를 위한 논리'가 되어서는 안된다고 주장한다.
또한 종래의 '형이상학'이 '종교의 시녀 노릇'을 해 온 것에 대해 그는 무섭게 비판하고 있다.
그는 '종교와 학문'은 '무관한 것'으로 간주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종교'는 불확실한 미래에 대한 '불안'에 의해 생긴 '신앙의 소산'이며 따라서 '학문'은 그 같은 '불안'을 '숭배'해서는 안된다는 것이 그의 논리이다.
하지만 그는 '종교'를 완전히 '부정'하지는 않는다.
왜냐하면 그는 인간이 '불완전한 존재'라는 것을 인정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는 이렇게 말한다.
'철학자 흄은 무신론자다.
하지만 영국인으로서 흄은 종교와 신앙을 인정하는 선량한 시민이다.'

 

- 철학이 뭐꼬?[ David Hume (1711-1776) ]에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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