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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스트와 중세 유럽

아미고 Amigo 2009. 2. 27. 14:34

(출처 : 네이버 지식 iN)

 

 

 

1.들어가는 말

  어느 날 갑자기, 정체를 알 수 없는 전염병이 전 세계를 덮친다면, 과연 어떠한 일이 일어날까? 백신이나 치료약은커녕 그 발병 원인조차 알 수 없는 이 무시무시한 전염병은 엄청난 기세로 전 세계로 퍼져나간다. 그리고 남녀노소, 가진 자와 못 가진 자, 힘 있는 자와 힘 없는 자를 막론하고 모든 이들이 이 전염병으로 인해 하나하나 쓰러진다면, 과연 사람들은 이에 대해 어떻게 반응할까. 목숨을 건지기 위해 필사적으로 달아나는 이들, 어차피 죽기 전에 마음껏 쾌락을 탐닉하는 이들, 모든 것을 체념하고 신의 자비와 구원을 호소하는 이들 등 전 세계는 공황 상태에 빠지게 될 것이다. 이러한 모습은 어느 정도의 의학적 지식을 갖추었고 보다 이성적으로 사고할 수 있게 된 현대인들조차 에이즈나 사스(SARS) 사태에 지나치게 민감하게 반응하는 모습을 통해 쉽게 짐작할 수 있는 것이다.

  그리고 이와 동일한 양상의 사건이 14세기 중반의 유럽에서 실제로 발생하였다. 동방으로부터 전해진 페스트라는 이 새로운 질병은, 1347~52년의 기간 동안 유럽 전역을 휩쓸면서 전 유럽인들의 1/3에서 1/2의 목숨을 앗아갔던 것이다.1) 이러한 전대미문의 사건을 겪었으면서도 끝내 살아남을 수 있었던 이들은 틀림없이 예전과는 크게 다르게 느끼고 다르게 살아나갔을 것이다. 따라서 이 글에서는 먼저 페스트의 개념과 페스트가 전파되기 이전의 중세 유럽 사회의 양상에 대해 살펴보고, 페스트가 유럽에 전파되어 확산되는 과정과 이에 대한 당대인들의 인식과 대응, 그리고 페스트가 물러난 이후의 유럽 사회의 변화에 대해 살펴보도록 하겠다.

 

 

 

 

2.페스트의 개념

  먼저 페스트에 대해 일반적으로 사용되는 호칭인 ‘흑사병(黑死病, black death)’이라는 말의 유래에 대해 살펴보자. 이름에서부터 강하게 드러나는 검은 색의 이미지의 유래에 대해서는 지금까지 여러 가지 설명이 시도되었다. 즉 페스트 환자의 몸에 발생하는 검은색이나 자주색의 반점에서 유래하였다는 설, 페스트가 창궐하기 직전에 나타났다는 검은 혜성에서 유래하였다는 설, 너무나 많은 이들이 검은 상복을 입어야만 했다는 점에서 유래하였다는 설, 심지어는 당시 페스트에 대한 당대인들의 인식이 검은 말을 탄 남자 혹은 검은 거인의 이미지였다는 점에서 유래하였다는 설도 있다.

  하지만 이러한 모든 설명들은 정작 ‘흑사병’이라는 말 자체가 한창 페스트가 유행하던 14세기 중반에서는 쓰이지 않았고, 1555년에 이르러서야 스웨덴에서 처음으로 사용되었다는 점에서 그 신빙성을 잃게 된다. 그리고 이에 대한 가장 유력한 설명은, 원래 페스트를 뜻하는 라틴어 ‘페스티스 아트라(pestis atra)’ 또는 ‘아트라 모르스(atra mors)’의 ‘아트라’라는 단어는 ‘검다’라는 뜻 외에도 ‘지독한’ 혹은 ‘무서운’이라는 뜻도 함축하는 것이었지만, 이를 영어나 스칸디나비아어로 옮기는 과정에서 ‘검은 죽음’이라고 곧이곧대로 옮기는 바람에 그대로 굳어졌다는 것이다.2)

 

그렇다면 이제 페스트라는 질병의 개념에 대해 알아보도록 하자. 페스트의 원인이 되는 파스튜렐라 페스티스(Pasteurella Pestis)라는 세균은 예전부터 동물의 혈관이나 벼룩의 내장에서 서식하는 세균이었다. 따라서 원래 페스트는 벼룩을 매개로 하여 설치동물들, 특히 쥐에게서 쥐에게로 옮겨지는 질병이었다. 그러나 간혹 페스트에 감염된 쥐에게서 떨어져 나온 벼룩이 사람을 공격하거나, 혹은 페스트 환자로부터 다른 사람에게로 벼룩이 옮겨갈 경우 페스트는 사람을 공격하게 되는데,3) 이 경우의 일반적인 증상은 선(腺) 페스트에 해당한다. 즉 사타구니나 겨드랑이, 목 등의 임파선이 커다랗게 부어오르는데, 이 경우 환자는 고열과 갈증에 시달리다가 보통 나흘에서 1주일 이내에 죽거나 혹은 회복하게 되고, 치사율은 60%에서 심할 경우 90%에 달하게 된다.4)

 

 

이러한 선 페스트는 페스트의 유형 가운데 가장 두드러지고 가장 최초의 것이기는 하지만, 반드시 다수의 벼룩을 통해서만 사람에게 전염되고 환자로부터 다른 사람에게로 직접 전염되지는 않기에 발병율과 전염성이 낮으며, 치사율 역시 상대적으로 낮은 편이었다. 그러나 종종 겨울이 되면 선 페스트는 폐 페스트로 발전하게 되는데, 이 경우가 보다 위험하였다. 즉 폐 페스트 환자가 피가 섞인 기침을 하고 숨을 내쉴 때마다 페스트균이 공기 중으로 퍼지게 되고, 이로 인해 사람에서 사람으로 곧바로 전염될 수 있게 된 것이다. 또한 그 치사율 역시 대단히 높아서, 1921년의 만주 페스트의 경우 폐 페스트 환자들은 겨우 1.8일밖에 살지 못했고,5) 치사율은 완전히 100%에 달했던 것이다.6)

  특히 페스트균이 혈관을 공격하여 발생하는 패혈 페스트의 경우가 가장 위험하였다. 이 경우 환자의 혈관 속에는 한두 시간 내에 페스트균이 우글거리게 되고, 환자는 단 몇 시간 만에 사망하게 된다. 특히 패혈 페스트의 경우에는 환자의 피 속에 페스트균이 가득한 상태이기 때문에, 쥐벼룩뿐만 아니라 사람에게 기생하여 피를 빠는 벼룩에 의해서도 쉽게 페스트가 퍼질 수 있게 되었던 것이다. 비록 패혈 페스트는 대단히 드문 증상이었지만 폐 페스트만큼 치명적이었고, 또한 페스트가 새로운 지역에 정착하여 무자비하게 퍼져나갈 수 있는 또 다른 발판이 되었다고 할 수 있다.7)

 

 

 

3.페스트 전파 이전의 유럽 사회의 양상

  그렇다면 이제 동방으로부터 페스트가 전파될 무렵의 유럽 사회의 양상에 대해 간략히 살펴보도록 하자. 5세기의 로마 제국 멸망 이후 줄곧 ‘암흑시대’ 속에 가라앉아 있던 유럽은, 12세기를 전후한 시점부터 어둠 속에서부터 서서히 떠오르기 시작하였다. 오늘날보다 온화했던 기후, 그리고 삼포제 농법, 물레방아, 새로운 쟁기와 멍에, 역축(役畜)으로서의 말(馬)의 사용 등 농업 기술의 진보는 농업 생산성을 향상시켰고, 이로 인한 인구 증가는 다시 경작지 확장의 원동력으로서 작용하였다. 또한 11세기부터 서유럽 지역을 중심으로 하여, 영주 직영지가 축소·소멸되고 농민들의 부역의 부담이 줄어들면서 영주에게 부역 대신 생산물이나 화폐를 지대로 바치는 새로운 형태의 장원제가 발달하기 시작하였는데, 이는 농민들의 부담을 줄이고 경제적 성취 욕구를 높이는 데에 크게 기여하였다. 그리고 이러한 생산성 향상에 힘입어 수공업과 상업이 발전하면서 도시가 부활하였고, 동방과 서방, 그리고 남유럽과 북유럽을 잇는 육·해상 교역로를 따라 무역이 활발하게 이루어졌다.8)

 

 이러한 ‘농업 혁명’ 시대의 유럽의 발전상은 몇 가지 통계 자료를 통해서도 입증된다. 먼저 인구의 경우, 로마 제국의 전성기였던 서기 200년경에 약 6,700만 명이었던 유럽의 인구는 700년경에는 2,700만 명으로 급감하지만, 1000년경에는 4,200만 명, 그리고 1300년경에는 7,300만 명으로 증가하여 처음으로 로마 제국 시대의 인구를 앞지르게 되었다.9) 또한 곡물의 파종량 대 수확량의 비율로 본 농업 생산성은 카롤링 조의 1:2에서 12~13세기에는 1:2.5~4.0으로 크게 향상되었고,10) 경제 역시 연 평균 최고 0.5%의 성장률을 기록하였을 것으로 추정된다.11) 도시의 성장도 두드러져서, 독일의 경우 1000년경에는 약 150개였던 도시의 수가 1200년경에는 1,000여 개로, 그리고 14세기 중엽에는 무려 3,000여 개로 급증하였던 것이다.12)

  그러나 마치 유럽 문명의 화려한 부활을 보여주는 듯한 이러한 발전 양상은, 사실 그 기반이 대단히 취약한 것이었다. 즉 농업 기술의 획기적인 발전이나 새로운 생산 수단의 등장이 수반되지 않은 상태에서, 급증하는 인구를 부양할 수 있는 유일한 수단은 오직 경작지 확대밖에 없었다. 하지만 애초에 토지의 면적에는 한계가 있었고, 그나마 경작할 수 있는 땅이라면 산림이든 황무지든 모조리 개간되었다. 이로 인해 산림 자원이 훼손되고 토지의 생산성이 떨어졌을 뿐만 아니라, 건초를 생산하는 목초지의 면적이 축소되면서 가축의 수가 줄어들었는데, 이것은 농민들의 영양 상태가 악화됨은 물론 당시 주요한 거름이었던 가축의 분뇨가 줄어들면서 토질이 더욱 척박해짐을 의미하는 것이었다.13) 또한 장원제의 성격이 변화하자 농민층이 분화되면서 대다수의 농민들이 빈농으로 전락하였는데, 이들은 생계를 유지할 수 있을 만큼의 토지도 보유하지 못하였다.14) 게다가 중세 유럽 사회는 공권력이 부재한 사회였기에, 기근에 대처하기 위해 식량을 저장하고 이를 분배한다든가 다른 지역의 식량을 신속히 수송한다든가 하는 것이 사실상 불가능하였다.15)

 

 

이러한 상황에서는 홍수나 늦서리 등으로 인한 단순한 흉작으로도 커다란 사회 문제가 발생할 수 있었는데, 특히 이러한 위험은 지금까지 온화했던 기후가 변하여 13세기 말부터 유럽에서 소빙하기가 시작되고 기상 이변이 빈번해지면서 더욱 심각해졌다.16) 실제로 대홍수로 인한 1315년의 대기근은 1317년까지 이어지면서 유럽 인구의 약 1/10의 목숨을 앗아갔고, 그 외에도 크고 작은 기근이 끊임없이 유럽을 강타하였다.17) 그리고 기근과 식량 부족, 전염병이 끊임없이 반복되는 상황 하에서, 유럽인들은 이에 능동적으로 대처할 의지마저 잃어버린 채 세상의 종말이 가까워졌음을 절감해야 했다.18) 결국 14세기 중반의 유럽인들이 기근과 영양실조에 시달리고, 지배 계급의 수탈과 잦은 전쟁으로 인한 약탈로 고통 받고, 이에 대해 어떻게 저항해 볼 의지마저 꺾여버린 상태에서 페스트라는 최악의 파국이 닥쳐왔던 것이다.

 

4.페스트의 유럽 전파 및 확산 과정

  14세기의 유럽인들을 공포의 도가니로 몰아넣은 페스트는 과연 언제, 어디에서 기원하였던 것일까? 당시 유럽과 중동의 역사가들은 이구동성으로 이 새로운 질병이 ‘동방’으로부터 전래되었다고 기록하고 있다.19) 그리고 오늘날의 학자들의 연구에 따르면, 페스트는 1330년대에 중앙아시아 지역을 시작으로 하여 인도, 중동, 이집트, 그리고 유럽으로 전파된 것으로 추정된다.20) 특히 중앙아시아의 이시크 쿨(Issik Kul) 호반 부근에서 발견된 네스토리우스 기독교 교도들의 공동묘지에는 1337~39년 사이에 ‘역병’으로 사망하였다는 수많은 이들이 매장되어 있는데, 학자들은 이것을 페스트 발생의 최초의 사례로 간주하고 있다.21) 한편 학자들에 따라서는 페스트는 1250년대에 몽골 군대가 운남성과 버마 지역을 침공한 뒤 귀환하는 과정에서 몽골의 초원 지대로 옮겨졌고, 그 뒤 1331년부터 중국 전역에 걸쳐 페스트가 유행하였으며, 그 뒤 1340년대부터 중앙아시아의 대상로를 거쳐 서방으로 전파되었다고 주장한다.22) 그러나 유럽에 페스트가 전파되기까지 약 100년이라는 시간적 격차가 발생하였다는 점과, 중국에서 유행하였다는 ‘대역(大疫)’이 과연 페스트를 가리키는 것인가 하는 점을 들어 반론도 제기되고 있는 실정이다.23)

 

이처럼 일단 중앙아시아의 초원 지대로 전파된 페스트는, 기후 변화 혹은 자연 재해로 인해 그 지역의 유목민들이 더 나은 곳으로 이주하게 되면서(혹은 쥐들의 원래 서식처가 파괴되면서), 쥐들 역시 이동하기 시작하여 다른 지역의 쥐들과 접촉하면서 확산되기 시작하였다.24) 그리고 이 과정에서 중앙아시아로부터 동유럽 전역에 이르기까지 분포되어 있었던 대상들의 교역로가 페스트의 확산에 커다란 기여를 하였을 것으로 간주되는데, 그것은 대상들이 묵는 숙소에는 항상 상인들과 여행자들, 그리고 낙타 등의 가축들이 모여들었고, 또한 이들을 위한 식량이 일정량 비축되어 있었을 것이기 때문에, 쥐와 쥐에 기생하는 벼룩에게 좋은 환경을 제공해 주었을 것이기 때문이다(훗날 서유럽 내륙 지역에서는 제분소가 이와 유사한 역할을 하였다).25) 어쨌든 이와 같은 과정을 거쳐 페스트는 유라시아 대륙을 가로질러 1345~46년에는 흑해 연안의 킵차크 칸국에 이르렀고, 그 곳에서 카프카스 산맥을 넘어 남하하여 1348~49년에는 중동과 이집트 지역에서 페스트가 유행하기 시작하였다.26)

  한편 유럽으로의 페스트 전파는 보다 극적인 과정을 거쳐 이루어졌다. 1346년에 페스트가 흑해 연안의 크림 반도에까지 이르렀을 때, 그 곳은 자니벡(Janibeg, 1341~57)이 이끄는 킵차크 칸국의 군대가 반도 끝자락에 위치한 제노바 상인들의 무역 근거지인 카파(Kaffa)를 3년째 포위한 상태였다. 그러나 페스트로 인하여 몽골 군대 내에 사망자가 속출하게 되자, 자니벡은 부득이하게 포위망을 풀고 철수할 것을 명할 수밖에 없었다. 이 때 몽골 군대는 페스트에 감염되어 죽은 시체들을 투석기에 담아 성 안으로 날려 보냈는데, 이로 인해 카파 시내에도 페스트가 퍼지기 시작하였던 것이다27)(그러나 어떤 학자들은 이러한 극적인 사건이 아닌, 단지 몽골 군대 진영으로부터 몰려온 쥐들에 의해 페스트가 전파되었을 것으로 추정하기도 한다28)). 어쨌든 몽골 군대의 포위에서 벗어난 제노바 상인들은 페스트를 피하기 위해 1347년 여름에 앞 다투어 배를 타고 이탈리아로 향하였는데, 이 때 쥐와 벼룩, 그리고 페스트도 함께 배를 타고 그 뒤를 따랐다.

 

그리고 이때부터 페스트는 배편을 통해 지중해 전역으로 확산되었고, 시계 방향으로 커다란 반원을 그리면서 불과 5~6년 만에 유럽 대륙 전역을 휩쓸고 지나갔다. 즉 1347년에는 콘스탄티노플과 시칠리아로, 1348년에는 북아프리카, 이탈리아, 프랑스, 이베리아 반도 및 발칸 반도로, 1349년에는 영국과 독일 중부, 덴마크, 그리고 헝가리로, 1350년에는 독일 북부와 스칸디나비아 반도로, 1351년에는 폴란드 북부와 리투아니아 등 발트 해 연안 지역으로, 마지막으로 1352년에는 러시아 지역으로까지 확산되었던 것이다.29) 특히 12~13세기에 상업이 발전하면서 육·해로를 통한 이동과 교역이 활발해진 것이 오히려 페스트의 신속한 확산을 도운 꼴이 되고 말았다. 물론 폴란드와 플랑드르 지역, 그리고 밀라노 등과 같이 페스트의 영향을 그리 심하게 받지 않은 지역도 존재하였지만, 유럽 대륙의 거의 대부분의 지역에서 페스트는 당대인들에게 엄청난 살육과 정신적 충격을 안겨 주었던 것이다.

 

 

그렇다면 이 때 페스트로 인해 사망한 유럽인들의 수는 얼마나 되었을까? 당시의 유럽인들은 페스트의 가공할만한 위력과 지극히 높은 사망자 비율에 대해 많은 기록을 남겨 두었고, 특히 어떤 이들은 당시의 사망자들의 수에 대해 1자리까지 확실하게 언급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기록은 중세 유럽인들이 정확한 수치에 대한 필요성을 거의 느끼지 못하였다는 점과, 페스트로 인한 충격으로 인해 기록이 과장되었을 가능성이 크다는 점을 고려해 볼 때, 신빙성이 낮다고 하겠다. 또한 페스트로 인한 사망자 비율이 국가와 지역에 따라 편차가 심하였다는 점 역시, 전체 사망자 수를 추정하는 것을 한층 더 어렵게 한다. 따라서 현대의 학자들은 1347~52년의 기간 동안 페스트로 인해 사망한 이들은 전체 유럽 인구의 1/3 이상,30) 혹은 1/4에서 1/2에 달하였을 것으로31) 조심스레 결론을 내리고 있다. 즉 겨우 5년 정도의 기간 동안에 무려 2,400만 명이나 되는 사람들이 지상에서 영원히 사라지게 되었던 것이다.32)

 

 

 

 

 

 

 

 <주석>

1) 배영수 외, 『개정판 서양사 강의』(서울: 한울, 2003), 165쪽.
2) 필립 지글러, 『흑사병』, 한은경 譯(서울: 한길사, 2003), 30~31쪽.
3) 프레더릭 F. 카트라이트·마이클 비디스,『질병의 역사』, 김훈 譯(서울: 가람기획, 2004), 54~55쪽.
4) 필립 지글러, 앞의 책, 43~44쪽.
5) 같은 책, 44쪽.
6) 윌리엄 H. 맥닐, 『전염병과 인류의 역사』, 허정 譯(서울: 한울, 2003), 183쪽.
7) 필립 지글러, 앞의 책, 45쪽.
8) 배영수 외, 앞의 책, 135~161쪽.
9) 쟈크 르 고프, 『서양 중세 문명』, 유희수 譯(서울: 문학과 지성사, 2003), 295쪽.
10) 배영수 외, 앞의 책, 136쪽.
11) 같은 책, 138쪽.
12) 페르디난트 자입트, 『중세의 빛과 그림자』, 차용구 譯(서울: 까치글방, 2002), 212쪽.
13) 배영수 외, 앞의 책, 165쪽.
14) 같은 책, 144쪽.
15) 쟈크 르 고프, 같은 책, 280쪽.
16) 페르디난트 자입트, 같은 책, 389~390쪽.
17) 배영수 외, 앞의 책, 165쪽.
18) 필립 지글러, 앞의 책, 52~54쪽.
19) 같은 책, 26~27쪽. 김호동, 『동방 기독교와 동서 문명』(서울: 까치글방, 2002), 287쪽.
20) 아노 카렌, 『전염병의 문화사』, 권복규 譯(서울: 사이언스북스, 2004), 136~137쪽.
21) 김호동, 앞의 책, 291쪽.
22) 윌리엄 H. 맥닐, 앞의 책, 176~180쪽.
23) 김호동, 앞의 책, 290~292쪽.
24) 같은 책, 292쪽. 아노 카렌, 앞의 책, 136쪽.
25) 윌리엄 H. 맥닐, 앞의 책, 180쪽.
26) 김호동, 앞의 책, 287쪽.
27) 같은 책, 286쪽.
28) 아노 카렌, 앞의 책, 137쪽.
29) 필립 지글러, 앞의 책, 140~141쪽.
30) 같은 책, 284~286쪽. 윌리엄 H. 맥닐, 앞의 책, 184쪽.
31) 아노 카렌, 앞의 책, 140쪽.
32) 프레더릭 F. 카트라이트·마이클 비디스, 같은 책, 58쪽.

 

 

5.페스트의 유행에 대한 당대인들의 인식과 대응

  그렇다면 이처럼 그 정체를 알 수 없는 무시무시한 질병인 페스트가 전 유럽을 휩쓸고 있을 때, 당대인들은 이를 어떻게 인식하고 대응하였을까? 당시의 유럽인들이 페스트의 발병 원인이나 전염 방식, 그리고 치료법 등에 대해 제대로 인식하지 못하고 있었음은 명백하다 하겠다. 당시의 일반적인 해석은 ‘독기(毒氣)’, 즉 오염된 공기의 독성으로 인해 페스트가 발생하였다는 것이다(참고로 페스트의 어원인 ‘페스틸렌시아[pestilencia]’는 원래 ‘건강에 좋지 못한 날씨나 대기’를 뜻하는 라틴어라고 한다33)). 이러한 공기 오염의 원인에 대해서도 다양한 해석이 시도되었는데, 행성의 움직임, 대지진, 부패한 시체, 그리고 누군가의 독약으로 인한 물과 공기의 고의적인 오염 등이 그 원인으로 제기되었다.34)

  이처럼 오염된 공기가 페스트의 주된 원인으로 지목되자, 사람들은 페스트를 예방하기 위해 집집마다 불을 피워 방향 물질을 태웠고, 식초로 가재도구를 소독하였으며, 창문을 꼭꼭 걸어 잠근 채 페스트 환자나 시체를 보는 것조차 두려워하였다. 그리고 의사들은 가죽옷과 안경, 그리고 주둥이가 뾰족하고 그 속에 방향 물질을 채워 넣은 특수한 마스크를 착용한 채 환자들을 돌보았다.35) 한편 페스트 환자들을 치료하기 위해 의사들은 온갖 약물과 식이 요법을 동원하였고, 중세의 만병통치술이었던 사혈(瀉血)과 관장을 실시하였으며, 부어오른 임파선 종을 잘라 내거나 불로 지지는 방법까지 시도하였다.36) 그러나 이러한 필사적인 노력조차도 페스트로부터 자기 자신들을, 그리고 환자들을 보호하는 데에는 아무런 도움이 되지 못하였다.

 

이처럼 페스트의 재앙을 피하기 위한 인간의 노력이 아무런 효과가 없음이 점차 명백해지자, 잦은 기근과 전염병의 고통에 익숙해져 있던 중세 유럽인들은 페스트 역시 ‘신의 의지의 표현’, 혹은 ‘신의 징벌 수단’이라는 손쉬운 해결 방식을 찾았다. 특히 개중에는 페스트를 이 세상의 종말의 징조로 보고 신의 분노를 가라앉히기 위해 스스로의 죄를 고백하고 자신의 몸을 채찍질하는 이들이 나타났는데, 이들이 바로 ‘채찍질 고행단’이었다. 이러한 운동은 1260년에 이탈리아에서 처음 시작되었지만, 페스트가 기승을 부리던 1348년부터 주로 독일 지방을 중심으로 하여 폭발적으로 번져나갔다. 이들은 단장의 엄격한 계율 하에 공동생활을 하면서 마을과 마을 사이를 줄지어 행진하였고, 도시나 마을에 들어서게 되면 시장이나 광장에서 공개 미사를 올린 뒤, 큰 소리로 자신들의 죄를 고백하면서 스스로를 채찍질하였다.

 

페스트의 고통과 공포에 질려 있던 사람들은 이들의 이러한 모습을 보면서 일종의 카타르시스를 느꼈고, 1348년 5월에는 교황 클레멘스(Clemens) 6세 역시 이들을 후원하고 축복해 주었다. 그러나 이들의 운동이 점차 혁명성을 띠어갔고, 규율을 잃어버린 채 도적 떼나 다를 바 없게 되었으며, 또한 이들의 순례와 행진 자체가 페스트의 전파 및 확산을 더욱 부추기게 되자, 교황과 세속 군주들은 이들에 대해 단호하게 대처해 나갔고, 결국 채찍질 고행단은 1350년경에 그 자취를 감추게 되었다.37)

 

한편 사람들은 신의 분노를 가라앉히기 위해서는 자기 자신을 채찍질하는 것보다는, ‘죄의 상징’으로 여겨지던 다른 소수 집단을 희생양으로서 제거하는 것이 보다 손쉽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리하여 아랍인 등의 외국인, 순례자, 나병 환자들이 페스트가 확산되는 데에 일조하였다는 혐의를 받고 박해를 받았지만,38) 그 중에서도 가장 심한 박해를 받은 것은 바로 유태인들이었다. 그 이전부터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혀 죽게 한 자, 마왕 숭배자, 탐욕스러운 고리대금업자 등 죄악의 상징으로 간주되던 유태인들은, 페스트가 유행하자 체포되어 고문을 받고 자신들이 우물과 냇물에 독약을 풀어 오염시켰다고 거짓 자백을 해야만 했다. 그리고 이때부터 유럽 전역에서 이와 유사한 자백들이 쏟아져 나왔고, 스위스, 독일, 프랑스, 스페인 등지에서의 유태인 학살은 1348~49년의 기간 동안 최고조에 달하였다.39) 유태인을 보호하기 위한 교황과 세속 군주들의 노력은 별다른 효과를 거두지 못하였다. 그리하여 1351년에 페스트와 함께 유태인 학살 열기 역시 수그러들었을 때, 유럽에서는 유태인들의 대형 공동체 6개와 소형 공동체 150개가 사라졌고, 350회 이상의 학살이 자행되었다고 한다. 결국 이로 인해 중·서부 유럽에서는 유태인 공동체가 완전히 뿌리 뽑혔고, 살아남은 유태인들은 페스트와 박해를 피해 폴란드와 리투아니아 등 동유럽 지역으로 대거 도피하였던 것이다.40)

 

마지막으로 페스트는 당대인들의 윤리·도덕관마저 뒤흔들어 놓았다. 비록 페스트는 지위와 신분의 고하를 막론하고 모든 이들을 덮치고 있었지만, 귀족, 고위 성직자, 부자들은 페스트를 피해 시골로 도피할 수 있었고, 결국 도시와 농촌에 남아 페스트에 정면으로 맞서야 했던 것은 일반 민중들이었다. 그리고 이들 중에는 그저 묵묵히 자신의 할 일에 힘쓴 이들도 많았지만, 공권력이 와해되고 앞으로 살아남을 희망도 보이지 않는 상황 하에서 자포자기의 심정으로 방탕과 음행에 빠지는 이들도 많았다. 그리하여 프랑스에서는 도박과 호색이 유행하였고, 가무와 축제, 게임, 마상 경기 등이 계속되었으며, 심지어 동포들의 무덤 위에서 춤을 춘 이들도 있었다고 한다. 물론 당시의 성직자와 도덕주의자들은 이러한 도덕적 타락에 대해 비난의 목소리를 높였고, 이러한 타락이야말로 페스트라는 신의 징벌을 불러온 원인이라고 강조하였지만, 페스트가 유행하던 당시의 사회적 분위기 하에서 일반 민중들이 엄격한 윤리·도덕에 따라 행동할 것을 기대하는 것 자체가 무리였을 것이다.41)

 

 

 6.페스트 이후의 유럽 사회의 변화

  페스트가 중세 유럽 사회에 불러일으킨 가장 극적인 변화는, 바로 인구의 급격한 감소였다. 이미 1300년경을 기점으로 하여 잦은 자연 재해와 그에 따른 기근으로 인해 인구가 감소하는 추세에 있던 유럽 사회는, 페스트의 대유행이 결정적으로 작용하면서 이전의 ‘꽉 찬’ 유럽에서 ‘텅 빈’ 유럽으로 전락해 버리고 말았다. 즉 1300년경에 7,300만 명으로 그 정점에 달하였던 유럽의 인구는, 기근과 페스트가 복합적으로 작용하면서 1350년경에는 5,100만 명으로 급감하였고, 그 이후에도 11~12년 간격으로 페스트가 재발하면서 1400년경에도 4,500만 명 정도에 머물러 있었던 것이다.42) 자연히 유럽인들의 평균 수명 역시 대폭 낮아졌는데, 영국의 경우 1276년 당시 35.3세였던 것이 1275~1300년에는 31.3세, 1300~1325년에는 29.8세, 1326~1346년에는 27세로 계속 낮아지다가, 페스트 창궐기에는 17세까지 뚝 떨어졌으며, 1400년경까지도 20세 정도밖에 되지 못했다.43)

  이처럼 단기간에 걸친 급격한 인구 감소는 곧 노동력의 감소를 의미하였는데, 이것은 중세 유럽의 사회경제적인 측면에 커다란 영향을 미쳤다. 즉 농민들의 수가 급감하자 당장 영주의 땅을 경작하고 곡식을 수확할 일손이 크게 부족해지게 되었고, 결국 영주들은 예전에 비해 두 배 가까이 많은 임금을 주고 농경 노동자들을 고용해야만 했다. 그리고 페스트로 인한 인구 감소는 지역에 따라 그 편차가 심하였기에, 페스트의 화를 간신히 면한 지역의 농민들은 자신들보다 운이 없었던 지역에서 노동자들이 오히려 더 많은 임금을 받으며 일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고, 이때부터 더 나은 조건을 찾아 자신이 속해 있던 장원을 버리고 떠나는 일이 빈번해졌다. 한편 페스트로 인한 인구 감소는 곧 수요 감소로 이어지면서 농산물의 가격이 급락하였고, 반면 공산품의 경우 숙련공들의 사망으로 인해 오히려 가격이 상승하였다. 이처럼 임금의 상승, 농민들의 활발한 이주, 농산물과 공산품의 가격 변동은, 장원으로부터 들어오는 현물(즉 농산물) 수입에 의지하여 살아야 했던 영주들에게는 커다란 부담이 되었다.44)

 

이와 같이 지배 계급이 경제적 위기에 봉착하고 봉건적 질서가 위협받게 되자, 이에 대한 반동적인 조치들이 즉각 취해졌다. 즉 영국에서는 1349년 6월에 왕령으로 ‘노동자 조례’가 발표되었고 1351년에는 이것이 ‘노동자 법’으로 수정되어서, 페스트 이후 급등한 임금과 급락한 물가를 안정시켜 그 이전 수준으로 동결하고자 하였고, 아예 노동자와 장인의 임금을 성문화하기까지 하였으며, 농민들의 이주를 제한하고 이들에 대한 부역의 부과를 더욱 강화하고자 하였다.45) 그러나 이러한 법 제정만으로는 당시의 시대적 흐름을 되돌릴 수 없었고, 페스트라는 대재앙을 겪은 이후 막연하게나마 변화를 바라고 있던, 그리고 실제로 페스트가 물러난 직후 어느 정도의 경제적 이득을 맛보았던 농민들은 이러한 복고적인 정책에 크게 반발하였다. 결국 봉건제 자체의 모순이 심화되고 이에 대한 농민들의 불안이 가중되면서 14세기 말부터 농민들의 저항이 봉기의 형태로 격화되었고, 이러한 투쟁에 의해 마침내 봉건제는 점차 소멸되었는데, 이 과정에서 페스트는 분명 하나의 촉매이자 신호탄의 역할을 하였다고 볼 수 있다.46)

 

또한 페스트는 중세 교회의 위상에도 적지 않은 영향을 미쳤다. 중세 유럽 사회에 단단히 뿌리내린 교회 조직은 페스트가 창궐할 당시 이에 적극적으로, 그리고 조직적으로 대처해 나갈 수 있었던 유일한 세력이었다. 그리고 실제로 많은 성직자들이 페스트 환자들을 간호하고 이들에게 영적인 위안을 주며 시체를 매장하는 일에 헌신적으로 나섰고, 그 와중에 일반인들보다 더 높은 발병율과 사망률을 기록하게 되었을 정도였다. 그러나 이처럼 중·하급 성직자들이 페스트에 맞서는 임무에 적극적으로 나섰던 것과는 달리, 고위 성직자들의 경우 자신의 목숨을 건지기 위해 교구민들을 버리고 시골로 달아나는 경우가 적지 않았다. 또한 페스트가 유행하던 시기에 많은 성직자들이 사망하자 이들의 공석을 메우기 위해 자격 미달인 자들까지도 끌어들일 수밖에 없었는데, 이들은 대개 교구민들을 수탈하여 재산을 모으는 데에만 관심이 있었던 천박한 인물들이었다. 결국 선량하고 헌신적인 이들이 사라진 자리를 무책임하고 탐욕스러운 이들이 채우게 되면서 교회의 질적 수준이 낮아지게 되었고, 이는 페스트 유행 이후 종교적 감수성이 한층 고조된 중세 유럽인들이 교회에 대해 실망하게 되는 한 가지 요인이 되었다.47)

  한편 페스트는 중세 유럽인들의 심성에도 커다란 흔적을 남겼는데, 그것은 바로 삶에 대한 비관주의와 우울증, 그리고 정신적인 공허감이었다. 즉 이 시기의 유럽인들은 어디에서나 비참하게 죽어가는 이들, 그리고 이미 죽은 이들을 목격할 수 있었고, 그리고 자신들 역시 언제 어디서 죽을지 모른다는 위기감을 겪어야 했다. 그러다 보니 자연히 페스트로부터 목숨을 건진 유럽인들은 자신들의 곁에 항상 존재하고 있는 죽음이라는 존재의 힘과 그에 대한 두려움을 느낄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이러한 정신적인 불안과 공허감을 메우기 위한 유럽인들의 대응은 여러 가지 모순된 형태로 표출되었다. 한편으로는 종교적인 열정이 부활하여 곳곳에서 교회가 들어섰고 이에 대한 기부가 활발하게 행해졌는가 하면,48) 다른 한편으로는 마술과 마법, 이단, 신비주의에 대한 사람들의 관심이 크게 높아졌다.49) 또한 ‘채찍질 고행’으로 대표되는 영적인 경건함과 겸손함을 추구하는 이들이 있었던 반면, 사치와 탐욕, 음행, 기이한 옷차림 등에 빠져드는 이들도 있었다.50)

 

이러한 중세 유럽인들의 정신적인 방황과 우울증, 죽음에 대한 강박 관념이 가장 잘 드러나 있는 것은, 바로 당대의 예술 작품들이었다. 그 중 대표적인 것이 바로 ‘죽음의 춤’이었는데, 이것은 벌거벗고 썩어가는 해골들이 춤을 추면서 다양한 신분과 계층의 사람들을 둘러싸고 희롱하는 모습을 주제로 하는 작품들이다.51) 그 외에도 왕과 귀족, 젊은 남녀들을 덮치는 죽음의 광경이 수없이 그려졌고, 죽음은 손에 낫을 든 해골의 모습으로 의인화되어 자주 등장하였으며, 무덤 앞의 비석에는 썩어가는 시체의 모습도 새겨졌다. 종교 예술 작품에서도 이러한 성향은 마찬가지여서, 구원과 승리를 표현하던 그리스도의 십자가 처형 장면도 슬픔과 공포로 바뀌었고, 중세 전성기에는 이 장면에서 희망을 내보이던 성모 마리아가 점점 더 우울하고 슬픔에 찬 모습을 보이다가 마침내 십자가 아래에서 통곡하는 모습으로까지 묘사되었다.52) 또한 ‘망토를 입은 동정녀 마리아’는 페스트로부터 신자들을 보호하기 위해 망토를 활짝 열어 신자들을 감싸 안는 모습으로 그려졌다.53) 그리고 페스트의 수호 성자로서 성 세바스티아누스(St. Sebastianus)와 성 로쿠스(St. Rochus)가 인기를 얻고 숭배의 대상이 되었으며, 예술 작품의 주제로도 자주 등장하게 되었다.54)

 

그리고 중세 유럽인들의 심성에 있어서의 이러한 변화는, 필연적으로 죽음에 대한 감수성에도 변화를 초래하게 되었다. 원래 중세 기독교 사회는 죽음 그 자체보다는 사후 심판에 대한 두려움이 더욱 강한 사회였고, 죽음 역시 가족들에게 둘러싸여 임종을 맞이하는 ‘우리 모두의 죽음’의 형태를 띠고 있었다. 그러나 13세기 중엽부터 내세보다 현세를 보다 중시하고, 자신의 죽음을 가족 내에서의 죽음이 아닌 ‘나의 죽음’으로 인식하는 경향이 점차 생겨나기 시작하였는데, 이러한 움직임은 페스트에 의해 더욱 심화되고 강화되었다. 즉 도시화로 인해 조상과의 유대가 단절되고, 페스트 기간 동안에 가족과 친지를 많이 잃었으며, 또한 이 시기에 아무렇게나 버려진 채 썩어가는 시체들을 보면서, 사람들은 사후 심판과 부활에 대한 믿음을 잃고 현세의 삶에 집착하는 모습을 보이기 시작하였다. 그리하여 1350년경에 작성된 유언장의 서문에는 죽음에 대한 공포와 불안을 표현하는 음울한 상투어들이 많이 발견되고, 1350~80년대에 부자들과 유력자들 사이에는 자신이 죽고 난 뒤 화려한 장례 행렬을 연출해 줄 것을 요구하는 움직임이 폭발적으로 증가하며, 사후 심판과 부활에 대한 기대가 아닌, 땅 속에서 그저 썩어가기만 하는 시체에 대한 두려움을 반영하는 예술 작품들이 많이 등장하게 되었던 것이다.55)

 

 

 

 

 7.나오는 말

  1330년대에 중앙아시아 지역에서 처음 발병하였을 것으로 추정되는 페스트는, 동양과 서양을 이어주던 대상들의 교역로를 타고 인도, 중동, 그리고 유럽으로 급속하게 퍼져 나갔다. 당시 유럽인들은 지난 2세기 동안의 급속한 인구 증가의 반작용으로 14세기에 들어 계속되던 기근과 영양실조로 인해 고통 받고 있었다. 이처럼 육체적·정신적으로 모두 쇠약해져 있었던 유럽인들을 페스트라는 무시무시한 질병이 덮치면서, 순식간에 전체 유럽 인구의 1/3 이상의 목숨을 앗아가 버렸다. 치료나 예방 방법은커녕 그 정체조차 알 수 없었던 페스트라는 대재앙과 직면하게 된 유럽인들은 페스트 역시 ‘신의 의지’ 혹은 ‘신의 징벌’이라고 여기고서 묵묵히 참고 견디기도 하였고, 혹은 신의 분노를 가라앉히기 위해 스스로를 채찍질하기도 하였으며, 혹은 유태인 등 다른 이들에게 죄를 전가시키고 그들을 박해하기도 하였다. 그리고 페스트가 물러난 뒤의 유럽 사회에서는 봉건적 질서의 와해가 가속화되었고, 종교적 감수성은 높아진 반면 기존 교회에 대한 실망감은 더욱 심해졌으며, 삶에 대한 비관주의와 우울증, 그리고 죽음에 대한 강박 관념이 자리 잡으면서 중세 유럽인들의 삶과 죽음에 대한 관념 역시 크게 변하게 되었다. 이처럼 페스트는 중세 유럽의 인구, 사회경제, 종교, 심성 등의 영역에 커다란 충격을 안겨 주었기에, 많은 학자들이 페스트의 창궐을 가리켜 중세의 종언이자 근대의 시작을 구획하는 사건이라고 간주하였고,56) 이때에 비로소 현대인이 만들어졌다고 강조하였던 것이다.57)

 

물론 이러한 주장에 대한 반론도 만만치 않다. 중세가 4~5세기에 시작되어 18~19세기까지 계속되었다는 이른바 ‘장기적 중세’의 옹호론자들은, 르네상스나 종교개혁과 마찬가지로 페스트 역시 중세와 근대를 구획하는 기준이 될 수 없다고 주장한다. 즉 페스트의 유행은 인구 증가-기근-전염병-인구 감소로 이어지는 중세의 일반적인 현상의 하나였을 뿐이고, 페스트는 1347~52년의 일회성 사건이 아니라 그 이후에도 주기적으로 반복되어 최종적으로는 1721~22년까지도 이어졌으며, 페스트로 인한 인구 변화나 사회경제적 변화는 지역에 따라 편차가 대단히 컸고, 따라서 페스트의 유행 그 자체가 어떤 본질적인 변화를 불러일으킨 것은 거의 없다는 것이다.58) 그러나 비록 페스트가 본질적인 변화를 야기하지는 못했다 하더라도, 페스트가 기존의 봉건적 질서와 종교적 관념, 윤리·도덕적 질서를 크게 뒤흔들었고 그 붕괴의 속도를 극적으로 높였다는 사실만큼은 변함이 없을 것이다.59) 그리고 채 5~6년밖에 안 되는 기간 동안에 페스트로 인해 자신의 부모, 자식, 이웃, 친구들을 무수히 잃어야만 했던 중세 유럽인들은, 페스트가 유행하기 이전의 자신들과는 분명히 다르게 느끼고 다른 모습으로 살아가게 되었던 것이다.

 

 

<주석>

33) 한스 크리스티안 후프 編, 『쿠오바디스, 역사는 어디로 가는가』, 1, 정초일 譯(서울: 푸른숲, 2002), 221쪽.
34) 필립 지글러, 앞의 책, 34~38쪽.
35) 한스 크리스티안 후프 編, 앞의 책, 224~225쪽, 232쪽.
36) 필립 지글러, 앞의 책, 93~99쪽.
37) 같은 책, 112~123쪽.
38) 같은 책, 123~124쪽.
39) 제프리 리처드, 『중세의 소외집단』, 유희수·조명동 譯(서울: 느티나무, 1999), 157~158쪽.
40) 필립 지글러, 앞의 책, 126~135쪽.
41) 같은 책, 104~107쪽.
42) 프레데리크 들루슈 編, 『새 유럽의 역사』, 윤승준 譯(서울: 까치글방, 2003), 184쪽.
43) 같은 책, 185쪽.
44) 필립 지글러, 앞의 책, 292~295쪽.
45) 배영수 외, 앞의 책, 168쪽.
46) 필립 지글러, 앞의 책, 303~308쪽.
47) 같은 책, 320~327쪽.
48) 같은 책, 329~330쪽.
49) 배영수 외, 앞의 책, 183~186쪽.
50) 같은 책, 183쪽.
51) 같은 책, 167쪽.

 

52) 같은 책, 184쪽.
53) 유희수, 「14세기 중엽 페스트가 죽음과 저승의 이미지에 끼친 영향」, 『사총』, 46(서울: 고대사학회, 1997): 293쪽.
54) 한스 크리스티안 후프 編, 앞의 책, 245~249쪽.
55) 유희수, 앞의 책, 286~292쪽.
56) 같은 책, 279~280쪽.
57) 필립 지글러, 앞의 책, 287쪽.
58) 유희수, 앞의 책, 280~281쪽.
59) 필립 지글러, 앞의 책, 308쪽.
                                                                     (자료출처 : 네이버 지식i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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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로나19 바이러스가 제2의 페스트가 되지 않았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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