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화도

용두돈대(龍頭墩臺)와 신미양요(辛未洋擾)

아미고 Amigo 2010. 10. 25. 13:22

 

강화도는 서울에서 지척간이라 할 만큼 가까운 거리에 있을 뿐만 아니라 마니산과 참성단, 정족산성과 전등사, 고려궁지, 고인돌군 그리고 병인양요와 신미양요 등 수 많은 격전을 치러낸 (), (), 돈대(墩臺)들이 강화도 해안도로를 따라 즐비하게 있어서 많은 사람들이 여가생활의 하나로 또 더러는 문화유적 답사 차원에서 강화도를 찾고, 나 또한 가족과 친지 그리고 지인들과 더불어 강화도를 수 없이 많이 찾았지만 나는 그 많은 역사문화유적 중에서 용두돈대를 가장 좋아해서 여러 지인들에게 안내를 했다.

 

 

용두돈대를 좋아하는 이유는 첫째 그 풍광이 글자 그대로 용의 머리처럼 손돌목의 거센 물살에서 용틀임을 하는 것 같은 모습에 반한 것이고, 둘째는 이 곳 용두돈대에서 손돌목을 사이에 두고 건너편에 있는 손돌의 묘를 조망할 수 있기 때문이며, 셋째는 이 곳이 막강한 군대와 무기를 보유한 프랑스함대와 미국함대를 상대로 병인양요와 신미양요라는 처절한 전쟁을 치러냈던 격전지였기 때문이며 이러한 역사적 사실과 격전의 현장을 세상 사람들과 함께 나누고 싶어서이다.

 

강화도에는 고려시대와 조선시대에 걸쳐 많은 군사진지들이 구축되었으며, 강화에는 5진 7보 53돈대 8포대 8봉수 4요망대가 있었으며 그 중 일부가 복원되어 지금의 모습을 간직하고 있다. “()”은 강화도에 설치된 진지 중 가장 큰 단위의 부대가 배치되는 곳으로 요즈음의 우리나라 군사편제로 본다면 대대 정도의 부대가 주둔하는 곳이었고, “()”에 소속되어 있는 부대단위로 요즈음의 중대 정도의 부대가 배치되는 진지였으며, “돈대(墩臺)”에 소속된 부대 단위로 초계를 위한 초소가 설치되어 소규모의 병력이 배치되었던 곳이다.

 

포대(砲臺)”는 적의 사격으로부터 보호가 되며 포사격을 용이하게 하기 위해 축조된 진지였으며, “봉수(烽燧)”는 변란 등을 알리기 위해 봉홧불을 올리던 곳이며, “요망대(瞭望臺)”는 가시권 내의 모든 정황을 살피던 관측소 역할을 하던 곳이었다.

 

 

용두돈대는 인천광역시 강화군 불은면 덕성리에 있는 돈대로, 강화도의 53돈대 중 하나이며 광성보에 소속되어 있던 것으로 손돌목 해협의 곶 부리 암벽에 용의 형상을 갖추고 있다. 이 천연의 요새는 고려시대부터 군사적 요충지로 관리되어 1679년(숙종 5년)에 돈대가 설치되었다.

 

1866년의 병인양요(丙寅洋擾)1871년의 신미양요(辛未洋擾)를 치른 격전지였던 용두돈대는 성벽 등이 크게 파괴되었던 것을 1977년에 국방유적복원정화사업으로 복원되었으며, 광성보의 안해루를 지나 용두돈대에 이르는 오솔길의 소나무 숲과 석축으로 만들어진 교통호를 따라 걷노라면 그 정취가 너무나도 아늑하여 이 곳이 선열들의 선혈이 낭자했던 격전지라는 것을 잊기 십상인 곳이다.

 

용두돈대(龍頭墩臺)

중앙에 강화전적지정화기념비가 있으며...

그 오른 쪽에는 네덜란드의 대포를 모방해서 든 중국식 대포라는 홍이포가 있다.

 

 

 

 

 

 

용두돈대 전경(全景)

용두돈대 건너편 덕포진(경기도 김포시 대곶면 신안리)

손돌묘(孫乭墓)에서 바라본 용두돈대 전경 

 

 전술한 바와 같이 용두돈대는 광성보에 소속된 돈대이고, 광성보는 광성보 전체의 지휘소였던 안해루(按海樓)를 지나 나지막한 소나무 숲 오솔길을 걸어가면 왼편에 신미양요순국무명용사비(辛未洋擾殉國無名勇士碑)가 있고 바로 옆에 쌍충비각(雙忠碑閣) 안에 어재연 장군과 그의 동생 어재순의 충절을 기린 쌍충비(雙忠碑)가 있으며 비각은 나중에 어씨 문중에서 비를 보호하기 위해 만들어 해마다 음력 424일에 제를 올린다고 한다.

 

한편 반대편 움푹 꺼진 음지쪽에는 신미양요 때 산화한 51명의 무명용사들의 신원을 확인할 수 없어 시신을 7기의 분묘에 합장한 신미순의총(辛未殉義塚)과 순절묘단(殉節墓壇)이라 새겨진 비석이 있다. 여기서 조금 더 가다가 오른쪽으로 오르막길을 조금 가면 펑퍼짐한 손돌목돈대가 있으며, 여기서 내리막길을 조금 가면 곶 부리에 용두돈대가 있고 그 오른편에 광성포대가 있다.   

 

 

 

광성보 안해루(按海樓) 

 

  많은 사람들이 1866년의 제너럴셔먼호 사건은 대강 기억하면서도 1871년(고종 8년)의 신미양요라 불리는 미국과의 처절한 전투와 그 전투로 막강한 군사력을 보유한 강대국 미국을 물리쳤다는 사실을 기억하는 사람들은 드물다.

 

미국 본국의 명령을 받은 로저스(Rodgers, John) 아시아함대 사령관은 조선개항을 명분으로, 그 이면에는 1866년에 대동강을 탐색하던 제너럴셔먼호의 승무원 24명이 조선에 의해 살해된 것에 대한 응징원정을 위해 1871년 5월 16일 일본의 나가사키항을 출발하여 3일 만인 5월 19일에 충청도 남양만을 지나 정박지로 계획한 인천의 작약도에 도착한다.

 

531일에 양국 대표가 협상을 하였으나 그 내용은 미국이 강화해협을 탐측하겠다고 일방적으로 통고하고 조선 관리들이 그 내용을 중앙정부에 보고하고 지시를 받을 겨를도 없이 6월 1일부터 탐측활동을 시작하였고, 이에 조선에서는 손돌목돈대에서 포격을 하였고, 로저는 함대에 있던 미군 육상전투대원 644명을 초지진에 투입하여 상륙작전을 감행하여 초지진을 점령한 다음 덕진진을 점령하고 연거푸 광성보를 공격하였다.

 

이에 조선에서는 어재연 장군을 비롯한 300여명의 조선군이 미군의 상륙을 저지하려는 전투가 벌어졌다. 조선군은 병력에서도 열세였을 뿐만 아니라 무기도 형편없이 열악한 처지에서 막강한 화력과 신무기로 무장한 미군을 상대로 처절한 전투 끝에 미군 3명이 전사하였고 중상자와 경상자가 각각 5명이었다고 한다. 반면에 미군의 기록에 의하면 전투 후 광성보 일대에 널려있던 시체가 243구, 해협에 떨어져 죽은 자가 100여구, 도합 350여명으로 집계된다. 

 

이 기록과 신미순의총에 기록된 53명간에는 많은 차이가 있지만 어쨌든 당시의 전투에 참여하였던 조선군은 모두 장렬하게 전사하였던 것으로 추정된다. 그러나 미국은 이 침략전쟁으로 조선군 350여명을 살육하였을 뿐 특별한 소득 없이 물러갔고 이 전투로 인하여 대원군의 쇄국정책의 상징이랄 척화비가 전국에 세워지게 된다.

 

 

 

 

 

 

 

신미순의총(辛未殉義塚)

묘비에는 순절묘단(殉節墓壇)이라 새겨져 있으며...

53명의 전사자 중 어재연 형제를 제외51명의 무명용사를 안장하였다고 한다.

 

 

황현의 매천야록에는 신미양요의 광성보 전투를 두고 칼을 들고 싸우다가 칼이 부러지자 납으로 된 탄환을 적에게 던지며 싸웠으며, 적의 창에 난자되고 머리를 베어갔다고 적었으니 다소의 상상력이 있는 듯 하나 조선군의 우국충정의 기상과 전투의 처참함은 절절히 표현된 것 같다. 

 

숲 속에 들어가서는 숲 전체를 볼 수 없듯이 용두돈대는 지역이 협소하여 내부를 볼 수 있을 뿐 그 전체를 보기는 어렵다. 하지만 건너편 경기도 김포시 대곶면 신안리에 있는 덕포진 파수청터(把守廳)를 지나 조금 더 올라가서 있는 손돌묘(孫乭墓)에서 바라보면 그 전경을 볼 수 있다. 용두돈대와 손돌묘 사이를 흐르는 염하강 손돌목을 조망할 수 있는데 용두돈대는 거리가 있어서 육안으로는 대강의 전경을 볼 수 있을 따름이고 망원경으로 보면 그 전체와 부분들을 모두 조망할 수 있다.

 

손돌(孫乭)은 고려시대 사람으로 1232년 몽골의 제2차 침략 때 고종의 강화 천도를 위해 개경에서 강화까지 천도길을 도운 뱃사공으로, 개경에서 출발하여 지금의 강화대교를 지나 용두돈대 앞에 이르면 용두돈대 곶 부리에 막혀 갑자기 앞이 막힌 것처럼 보이고 암초가 있어 물살이 거세, 고종이 뱃사공 손돌을 의심하여 목을 베었다 하여 용두돈대 앞 바다를 손돌목이라 하였다 하나 이 곳은 물살이 거센 곳으로 밀물에는 물이 남쪽에서 북쪽으로 역류하여 노 젓는 배로 이 물살을 오르기는 어려웠을 것 같고, 아마도 썰물을 타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여하튼 절경의 모습을 간직한 용두돈대가 그저 멋진 구경거리만이 아니라 지금의 우리와 우리나라가 있게 하기 위한 선열들의 피비린내 나는 역사의 현장이었다는 사실과 민족의 애환을 역사로부터 곱씹어 온고지신(溫故知新)의 역사문화 자료로 활용되면 어떨까!!!

 

 

 

 

 

 

손돌묘(孫乭墓)

용두돈대 건너편에 마주보고 있는 손돌묘 가는 길의 덕포진에는

학생박물관도 있다.

 

로저스 함대에서 신미양요를 함께 했던 미군 슐레이 소령은 그의 회고록에서

“조선군은 결사적으로 싸웠다. 대부분 맨주먹으로 싸웠으며 노후한 전근대적인 무기로 싸웠다. 그러나 미군은 앞으로 이보다 더 장렬하게 싸우는 국민을 다시는 찾아볼 수 없을 것이다.”라고 술회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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