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라도

추억여행 - 남쪽나라

아미고 Amigo 2009. 8. 23. 23:02

 

간만에 삶을 향한 열정과 새로운 에너지를 발전시켜보고자 추억 속으로의 여행을 다녀왔다. 항암치료 때문에 몸 컨디션이 들쭉날쭉인 아내가 걱정이기도 했지만, 그러하기에 이 여행을 강행했다. 일기가 고르지 않아 사진을 다 담지 못했다.

 

이 잔인한 봄에 내가 은퇴를 했고...

우리가 살아있음을 확인하고 그런 삶의 열망을 불태우는 여행이었다.

 

 

 

***** 여정은 *****

 

광한루 - 지리산 노고단 - 천은사 - 화엄사 - 연곡사&피아골 - 칠불사 - 지리산기념관 - 쌍계사 - 최참판댁(평사리) - 지리산 청학동 - 하동 송림 - 오동도 - 돌산도(향일암) - 송광사 - 운주사 - 해남 고산 윤선도 유적지 - 대흥사 - 땅끝 - 노화도 - 보길도(고산 윤선도 유적지 부용동, 예송리 해수욕장) - 다산초당 - 소쇄원 - 가사문학관 - 환벽당 - 취가정 - 식영정 - 송강정 - 면앙정 - 대나무박물관 - 메타세퀘이어 가로수길 - 태안사 - 조태일 시문학기념관 - 섬진강

 

 

 

 

광한루

 

광한루는 여말선초의 황해도 개성 출생의 문신 황희가 1418년에 충녕대군의 세자책봉에 반대하였다가 교하로 유배되었다가 다시 남원으로 이배되었을 때 건축한 것으로, 처음에는 광통루라고 하였는데, 후에 정인지가 고쳐 세우면서 광한루로 하였다.

 

약 600년 전인 조선 시대에, 그것도 유배 중인 선비가 이렇게 웅장한 누각들과 아름다운 정원을 만들었다니 그런 생각을 할 수 있는 가슴과 그런 건축과 토목공사를 감당할 수 있었던 재력에 놀라울 뿐이다.

 

어쨌거나 그 덕에 남원에는 상당한 수입이 있을테고, 세상 사람들에게는 역사의 유적이 되었다.

 

 

 

 

지리산 노고단 정상

 

온 종일 안개가 자욱하고 비기 오락가락 했다.

이번 여행 중 아내가 제일 힘들어했던 곳이다. 애꿎게도 세찬 비바람이 몰아쳐 더 더욱 그랬다.

 

건강이 회복되고 나면 함께 지리산 종주를 한번 하자고 했더니, 아무래도 종주는 어려울 것 같다고 했다. 하지만 꼭 함께 지리산 종주를 하며 운무 속에서 세상을 바라보고 싶다.

 

옛날에 외국인 선교사들이 있었던 건물 등이 모두 사라졌고, 등산로 또한 숲과 계곡의 오솔길이 아니어서 옛 정취가 모두 사라져버렸다.

 

 

 

 

천은사 일주문

 

애초에는 감로사(甘露寺)라고 하였으며, 구렁이 일화에 얽힌, 샘에 나타나는 구렁이를 죽여버리자 샘물이 나오지 않아 샘이 숨어버렸다는 천은사(泉隱寺)로 된 것을 이광사가  "지리산 천은사"라고 물 흐르듯이 쓴 현판을 걸자 샘물도 다시 나오고 모든 재앙이 사라졌다고 한다.

 

천은사 또한 진입로가 참으로 아늑하고 정취가 있었는데, 지금은 진입로에 저수지가 들어섰다.

 

 

 

 

 

최참판댁 (하동군 악양면 평사리)

 

사진은 서희의 별당으로, 박경리 선생님의 대하소설  "토지'의 배경이었던 평사리에 연전 "최참판댁"이라는 이름으로 소설 속의 건물들이 건축되었다.

 

평사리는 마을 뒷쪽으로는 지리산 자락이 병풍처럼 둘러쳐져 있고, 마을 앞으로는 상당히 넓은 분지 형태의 평야가 펼쳐지며, 그 평야 앞으로는 섬진강이 구불구불 유유히 흐른다.

 

최참판이 사랑채에서 내려다 보면 참으로 보기에 좋았을 것 같고, 내 눈엔 이 곳이 바로 천하명당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지리산에서 온갖 산채가 나오고, 평사리 기름진 들에는 오곡이 넘쳤을 테고, 섬진강 뱃길을 따라 해산물 또한 풍성했을 테니.....

 

 

 

 

지리산 청학동 입구

 

이번 여행 중 청학동은 초행길이었다.

머리 속에 청학동에 대한 우리 문화의 원형이나 그 그림자 같은 이런저런 생각들을 가지고 갔었는데, 청학동은 청학동 학원으로 변해버렸는데 그것도 기괴하게 변해서 청학동에 오게 된 걸 후회했다.

 

상상의 아름다움이 깡그리 짓뭉개져 버렸고, 배신감만 안고 발길을 돌렸다.

 

 

 

 

 

돌산도의 향일암 (向日庵)

 

글자 그대로 해를 향하고 있는 암자라는 것인데, 탁 트인 바다를 향한 바위절벽에 세워진 암자는 아름답기 그지 없지만 아쉽게도 주변이 절벽인지라 그 모습을 제대로 감상할 공간이 없다.

 

배를타고 나가서 바다에서 바라보거나 헬기 등을 타고 감상한다면 일품일 것 같았다.

 

 

 

 

 

 

천불천탑의 운주사

 

 천불천탑이 있었다는 운주사에 지금은 70기의 불상과 12기의 석탑 만이 남아 있다지만, 길이 12m 넓이10m의 바위에 나란히 누워있는 부부와불이 인상적이며, 이 와불을 일으켜 세우면 불국정토가 열린다는 얘기가 있다하니, 내 짧은 소견엔 당시에 이 지역엔 아마도 미륵신앙으로 충만했던 것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이 들고, 심지어는 도참사상도 가미되었을 수 있었겠다는 생각을 해 보았다.(잘 아시는 분의 가르침 바랍니다.)

 

하여튼 가람 배치가 아주 독특하고 정교하지 않은 불상들이지만 그러한 불상들이 논두렁 밭두렁에 널브러져 있던 것을 지금의 운주사 경내로 수습해 둔 것이라니 이런 저런 생각을 해보게 되고, 장엄함이나 엄숙함이 없이 자연스러움과 개방감이 사람의 마음을 탁 트이게 만드는 사찰이다.

 

이번 여행 중 가장 많은 감흥을 느꼈던 곳이어서 누구든 한번 쯤은 다녀올 것을 권하고 싶다.

 

 

 

 

보길도에 있는 고산 윤선도의 부용동 세연정과 세연지

 

어부사시사 등 많은 작품을 남긴 고산 윤선도는 삶의 대부분을 궁벽한 유배지에서 보내면서도 이 외진 보길도에 부용동이라는 정원을 만들 수 있었으니, 우선은 재력이 막대했을 것이고, 해남의 녹우당에서 말을 타고 땅끝까지 오자면 거의 하루가 걸렸을 테고, 또 다시 땅끝에서 보길도까지 배를 타고 가자면 또 하루쯤 걸렸을 테니, 그렇게도 시간이 더디게 갔던 시절과 당시의 윤선도가 참으로 부럽다.

 

자연을 정복의 대상으로 인식한 근대과학사상에 기초한 일본의 정원에 비하여, 삼라만상과 더불어 공생하는 삶을 추구했던 우리 선조들의 정원이나 정자는 정말이지 아름답고 자랑스럽다.

 

 한편 조선조부터의 해남윤씨의 막강한 재력이 오늘에 이르러 크라운제과에 그치고 있다는 것이 세월의 장난이려니 하는 생각이 들고, 어쨌거나 어렸을 적에 제일 맛있는 과자 중 하나는 바로 크라운 산도였고 그걸 즐겨 먹었으니 이런 문화유산을 남겨주신 윤씨 일가에 작은 보답은 한 셈이다.

 

 

 

 

다산초당

 

 다산 정약용 선생이 유배생활을 했던 강진의 다산초당은 지금은 숲이 무성하게 우거져 사진 마저도 어둡게 나올 정도지만, 다산 선생이 머물던 시절에는 필경 전면의 시야가 탁 트였을 것이고 그래서 한 눈에 강진 앞 바다를 내려다 볼 수 있는 경관이었을 것이다.

 

숲속 산길로 인근에 있는 백련사의 초의선사와 서로 오고 가며 차를 마시고 정담을 나눴다는 그 길과 정취를 나도 한번 느껴보고 싶었다.

 

아쉬움이 있다.

관리의 편리를 위해서 초당을 와당으로 만든 것 같은데, 초당이란 옥호가 무색하고 정감과 운치 또한 덜하다.

 

 

 

 

소쇄원 입구

 

대나무와 정자와 원림의 고장 담양에는  양산보의 소쇄원, 김윤제의 환벽당, 김덕령과 김만식의 취가정, 임억령과 김성원의 식영정, 정철의 송강정, 송순의 면앙정 그리고 가사문학관, 대나무박물관 등등이 많이 있지만 나는 그 중에서 왕대나무가 우거진 소쇄원 입구를 선택했다.

 

급진적 개혁파였던 조광조를 스승으로 공부했던 양산보가 조광조의 몰락을 보며 벼슬길을 단념하고 소쇄원을 만들고 당대의 선비 문인들과 교류하며, 그들이 남긴 사미인곡 성산별곡 등 주옥같은 가사문학을 우리에게 남겨주었다.

 

그나저나 당시에 조광조를 제거하기 위한 훈구파의 주초위왕(走肖爲王)의 흉계를 보노라면 예나 지금이나 기득권을 향유하려는 보수파의 집요함과 잔학함은 영구불변인가 보다.

 

 

 

 

 

태안사

 

동리산 태안사는 구례나 곡성을 경유해서 가노라면 섬진강을 거쳐 보성강을 지나 아름다운 계곡을 한참이나 올라가야 절이 나온다.

 

계곡이 맑고 아름다우며 특히 능파각이 절경이다. 그리고 절 입구에  "조태일 시문학기념관"이 세워져서 시원한 숲속에서 문학의 세계를 엿볼 수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