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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스타브 카유보트(Gustave Caillebotte, 1848년경∼1894년경, 프랑스)는 아주 부유한 집안에서 태어나 드가와 마네 등 인상파 화가들과 교류하고 후원하면서 본인도 인상파 화가가 되는 등 독특한 삶을 살았던 이야기를 “한국경제의 성수영 기자”가 재미있게 풀어놓았네요.
'비오는 날, 파리 거리'(1877) - 시카고미술관 소장
“저 남자, 왜 저래? 재산이 수천억 원에, 가만히 앉아만 있어도 매달 통장에 3000만원씩 꼬박꼬박 꽂힌다던데…. 하층민처럼 흉하게 땀 흘리며 일하고 있잖아.”
1877년, 비 내리는 프랑스 파리의 르 펠르티에 거리. 우산을 쓰고 걷던 남녀가 길가 전시장 앞에 멈춰 서서 수군댔습니다. 안에서 땀을 뻘뻘 흘리며 그림을 옮기는 인부들 사이에 유명한 부자인 구스타브 카유보트(1848~1894)가 섞여 있었기 때문입니다. “저 양반이 가난하고 성병 걸린 화가들한테 전시비를 대 주고, 같이 어울려서 그림도 그린다며?” “그래, 인상파라는 그 이상한 그림 그리는 작자들 말이야. 급이 떨어지게 저게 무슨 짓인가, 쯧쯧….” 사람들은 혀를 차며 다시 발걸음을 옮겼습니다.
그 말대로 카유보트는 ‘괴짜 금수저’였습니다. 이상한 그림을 그리는 거지꼴 화가들과 어울리며 용돈을 주고 그림을 사 줬습니다. 덕분에 그 화가들은 살아남아 훗날 인상파 거장이라는 이름으로 불리게 됐습니다. 카유보트 자신도 그림을 그렸습니다. 평생 놀고먹어도 되는 재산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당장 작품을 팔아야 밥을 먹을 수 있는 사람처럼 그림에 매달렸습니다. 전시 준비를 할 땐 직접 땀 흘리며 일했습니다. 비가 오는 풍경을 특히 잘 그렸던 카유보트. 비 오는 날의 이 아침을 카유보트의 이야기로 열어 봅니다.
'비 오는 예르 강'(1875). - 인디애나 대학 미술관 소장
삶이 지루했던 부잣집 아들
‘노동은 신성하다’고들 합니다. 하지만 현실은 좀 다릅니다. 많은 이들이 일하지 않고 놀고먹는 삶을 꿈꿉니다. 그도 그럴 것이, 깨어있는 시간의 절반 이상을 일하며 보내야 하니까요. 직장인이 아니라도 사정은 비슷합니다. 집안일이든 뭐든 항상 할 일이 태산입니다. 일하지 않아도 될 만큼 돈이 많다면, 한 번뿐인 인생을 내가 사랑하는 것들로만 채울 수 있을 텐데. 카유보트는 그런 삶을 살 수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금수저를 넘어선 ‘다이아 수저’를 물고 태어났으니까요.
'Le Pont de l'Europe'(1876). - 쁘띠 팔레 소장
그의 그림 속 등장인물들은 서로 깊이 교류하지 않는다. 이 때문에 그의 작품에서 에드워드 호퍼를 연상하는 사람들도 많다. 이런 거리감은 카유보트가 생전 느꼈던 외로움의 표현이라는 해석도 있다.
판사였던 카유보트의 아버지는 사업 수완이 탁월했습니다. 1841년 초반 섬유회사 지분을 4만5000프랑에 매입해 기업을 수백 배 규모로 키웠습니다. 그 이익으로 국채와 주식, 부동산을 매입했습니다. 호텔도 지었습니다. 이렇게 축적한 자산이 2000만 프랑. 지금 우리 돈으로 최대 5000억원에 이르는 막대한 돈이었습니다.
30세 때 카유보트의 사진.
이런 집안에서 자라난 카유보트는 최고 수준의 교육을 받으며 모범생으로 자라났습니다. 아버지의 뒤를 이어 법학을 공부한 그는 1870년 변호사 개업 면허를 땄습니다. 변호사로 돈을 벌 생각은 없었습니다. 가문의 막대한 재산에 비하면 변호사 수입은 푼돈 수준이었으니까요. 1873년 파리 국립고등미술학교(에콜 드 보자르)에 입학한 것도 사실 대단한 뜻이 있어서 내린 결정은 아니었습니다. ‘어린 시절부터 미술을 좋아했고 재능도 있으니, 한번 본격적으로 배워 볼까’ 정도의 생각이었지요.
'Portraits à la campagne'(1876). - 바론 제라르 미술관 소장
당시 파리에는 카유보트 같은 ‘금수저’들이 꽤 있었습니다. 기술과 자본주의의 발달, 식민지 개척 등의 흐름을 타고 엄청난 부를 얻은 가문 출신들이었습니다. 이들의 삶은 평온했고 풍족했지만, 지루했습니다. 지금이야 TV와 인터넷이 있지만 그 시절엔 밥 먹고 수다 떠는 것 외에는 일반적인 즐길 거리가 없다시피 했습니다. 이런 금수저 젊은이들의 삶을 ‘지루함과의 싸움’이라고 표현한 당시 기록도 있습니다. 그래서 카유보트가 이때까지 봐왔던 상류층 젊은이들은 대개 무기력하고 매사에 시큰둥했습니다.
그런데 학교에서 만난 사람들은 전혀 달랐습니다. 그곳에는 르누아르, 모네, 마네, 드가와 같은 화가들이 있었습니다. 가난했고 행실은 불량했으며 화풍도 거칠었지만, 이들에게는 맨주먹으로 세상을 헤쳐 나가는 사람 특유의 에너지가 넘쳐났습니다.
이들이 내뿜는 삶의 에너지는 카유보트의 가슴을 끓어오르게 했습니다. “한 번 사는 인생, 저들처럼 자신을 불태우며 살아야 한다.” 카유보트는 인상파 화가들과 어울리며 함께 본격적으로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습니다.
파리 시내 전경을 그린 'Boulevard des Italiens'(1880).
사실 카유보트는 평판이 나쁜 인상파와 굳이 엮일 필요가 없었습니다. 화풍부터가 사실적이라 인상파와 좀 달랐습니다. 평론가 찰스 바이거는 카유보트의 그림에 대해 “인상주의 맞냐”고 의아해했고, 한 일간지는 “인상파가 아니다. 진지한 그림을 그릴 줄 안다”고 단언했습니다. 그 말대로 당시 인상파는 “그림 같지도 않은 그림을 그린다”는 비판을 받던 상황. 카유보트 입장에서는 권위 있는 정통파 전시인 살롱에 작품을 내놓는 게 화가 커리어에 더 유리했습니다.
하지만 그의 마음속에 들끓는 에너지는 딱딱한 살롱보다 파리 길거리의 인상파 전시장에 더 잘 어울렸습니다. 1876년 열린 인상파의 두 번째 전시회에 공식적인 참여 작가로 초청받은 것도, 인상파 전시가 열릴 때마다 적잖은 비용을 댄 것도 이 때문이었습니다.
'바닥 벗겨내는 사람들'(1875). - 오르세미술관 소장
세심한 드로잉, 대담한 구도, 자연광의 섬세한 표현이 특징이다. 미술 역사상 도시 노동자들을 대상으로 하는 최초의 작품 중 하나다. 그 때문에 1875년 프랑스 최고 권위 전시회인 살롱에서 "저속하다"는 이유로 출품을 거절당하기도 했다.
‘일’을 빼앗긴 사람
일은 먹고 살기 위해 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삶에서 일이라는 걸 완전히 들어내 버리면 사람은 무기력해지기 쉽습니다. 일도 인생의 중요한 일부. 때로는 자신의 가치와 존재 이유를 증명하는 중요한 수단이자, 살아가는 보람을 주는 원천이 되기도 하니까요.
평생 일할 필요가 없던 카유보트가 노동을 동경했던 건 이런 이유에서였습니다. 그는 상류층 화가로는 이례적으로 노동 계급의 모습을 그렸습니다. 그림을 그리는 방식도 노동에 가까웠습니다. 아주 공을 많이 들여서 섬세하게 그렸습니다. “부자의 취미나 아마추어 수준이 결코 아니다. 집착이라고 할 정도로 필사적으로 그린다.” 인상주의 화가들과 친하게 지냈던 미술 평론가 구스타브 제프루아는 이렇게 평가했습니다.
1874년 아버지와 1876년 큰동생, 1878년 어머니를 연이어 잃은 후 그는 더욱 그림에 몰입했습니다. 딱 한 명 남은 가족인 막냇동생을 제외하면, 카유보트에게 세상과 자신을 묶어줄 것이라고는 미술뿐이었습니다. 동료들도 계속 챙겨 줬습니다. 1886년 제8회 인상파 전시까지 그는 꾸준히 그림을 그려 출품하면서 르누아르를 비롯한 화가들의 그림을 사 주고 용돈까지 따로 챙겨줬습니다.
'Les Périssoires'(1878). 보트를 타는 광경을 그린 참신한 구도의 작품이다. / 렌 미술관 소장
아이러니하게도 부모님이 물려준 막대한 재산이 ‘화가 카유보트’의 앞길을 막았습니다. 인상파 화가들에게 카유보트는 좋은 친구이자 후원자였지만 마음을 털어놓고 현실적인 고민을 의논하기엔 다소 부담스러운 존재였습니다. 화가들은 반드시 그림을 팔아서 돈을 벌어야 했지만 카유보트는 그럴 필요가 없어서, 이해관계가 좀 다르기도 했고요. “부잣집에서 태어나 편하게 산다”는 일각의 시선도 여전했습니다.
점차 카유보트는 그림에 흥미를 잃었습니다. 그리고 막냇동생과 함께 우표를 수집하거나 보트를 타고, 직접 보트를 설계하기도 했습니다. 이 모든 분야에서 카유보트는 두각을 드러냈습니다. 이들의 우표 컬렉션은 영국 최고의 우표 수집가에게 팔려 지금 대영박물관에 전시돼 있고, 카유보트가 설계한 보트 구조 중에서는 지금까지도 쓰이는 것들이 있을 정도입니다.
'창 밖을 바라보는 남자'(1876). 카유보트의 막내동생을 그린 작품이다. / 폴 게티 뮤지엄 소장
사랑했던 것들로 기억되다.
1887년 곁에 있던 막냇동생이 결혼해서 새로 가정을 꾸리며 카유보트의 곁을 떠나갔습니다. 홀로 남은 카유보트는 모든 게 허무해졌습니다. 가족을 연이어 잃었을 때의 상실감, 죽고 잊히는 것에 대한 두려움, 인간관계에 대한 허무감이 그의 마음을 사로잡았습니다. 카유보트는 지겨운 파리를 떠나기로 결심합니다.
'정원사들'(1875). - 개인소장
카유보트는 원예에도 진심이었다고 한다. 모네를 비롯해 화가들 중에서는 정원을 열심히 가꾼 이들이 많았다.
파리 북서부의 작은 마을에 자리를 잡은 그는 정원을 가꾸며 살았습니다. 친한 인상파 화가들과는 계속 만났고 생활비도 종종 챙겨줬지만, 그림을 모으는 일은 그만뒀습니다. 결혼은 하지 않았습니다만 하층민 출신의 연인과 함께 살았습니다. 당시 프랑스에선 이런 일이 흔했습니다. 그러다 뇌졸중으로 45세의 젊은 나이에 갑작스럽게 세상을 떠납니다.
평생을 풍족하게 살았지만, 물려받은 재산에 가려 노력과 재능을 제대로 인정받지 못했던 카유보트. 하지만 세상을 떠난 뒤엔 달랐습니다. 유언에 따라 그의 인상파 컬렉션은 루브르박물관에 기부됐습니다. 관련 업무는 유언에 따라 친구였던 르누아르가 도맡았습니다. 인상파를 극도로 싫어하던 당시 미술계 주류와 박물관 위원회는 탐탁지 않게 생각했지만, 일부 작품을 제외하는 조건으로 기부를 받았습니다. 그리고 이 작품은 지금 루브르박물관의 대표 소장품들로 꼽힙니다.
'Chrysanthemums in the Garden at Petit-Gennevilliers'(1893). 메트로폴리탄 박물관 소장
카유보트의 작품이 재평가받는 데는 시간이 좀 걸렸습니다. 재산과 작품을 물려받은 사람들이 모두 부자였기 때문에, 그림을 내다 팔려는 사람이 없어 노출 기회가 적었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한동안 ‘인상파 화가들의 마음씨 좋은 후원자’로만 기억되던 카유보트는 1960년대부터 본격적으로 화가로서의 역량을 재조명받았습니다. 지금 그는 19세기 말 파리의 모습, 그리고 비오는 풍경을 가장 아름답게 그린 화가로 꼽힙니다.
그가 안간힘을 써가며 그리고, 전시를 열고, 어렵게 모으고, 열렬히 사랑했던 그림들은 사후 100년 넘게 지난 지금도 카유보트가 어떤 사람이었는지를 생생하게 전해주고 있습니다. 온화하고 사려 깊으면서도 열정이 넘치는 사람이었다는 사실을요.
성수영 기자 syoung@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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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리 시내 전경을 그린 'Boulevard des Italiens'(1880).」
"파리 시내 전경을 그린"이라고 되어 있어 저도 원문 그대로 옮겼는데, "Italiens"이라고 쓰여있어서 좀 이상하기는 해요.
사람은 저마다 소명(召命)을 갖고 이 세상에 태어나는 모양입니다.
나는 그냥 놀다 가는 게 소명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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