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기, 충청

연천 “조선왕가” 한옥 호텔

아미고 Amigo 2021. 2. 4. 17:22

 

 

(2015.7.27) 

 

요즈음 구례군 마산면에 있는 고즈넉한 한옥에서 진행하는“윤-스테이”가 뜨고 있어서 잠시 쉬어갈 겸 처박아 두었던 연천의 한옥 호텔 “조선왕가”를 끄집어냈다.

 

“윤-스테이”를 각시와 함께 즐겨 보면서 연천에 있는 한옥 호텔 “조선왕가” 얘기가 자연스럽게 나오고 더불어 재인폭포와 한탄강의 추억들을 얘기한다.

 

그런가 하면 구례는 내가 유년 시절을 보냈던 고향(?)이기에 지리산, 섬진강, 화엄사, 천은사, 연곡사, 피아골 삼홍소(三紅沼) 등의 얘기가 나오면 둘 다 반갑게 반응한다.

 

 

 

 

 

 

 

 

“조선왕가”라는 이름은 설명문에서 얘기하는 것처럼 명륜동에 있었던 "염근당"을 해체하여 이곳으로 이건하였기에 붙여진 이름이란다.

 

호텔 이용요금이 20∼70만원대이니 만만치 않은 금액일 뿐만 아니라 나는 별 보는 것을 좋아해서 텐트 치는 것도 귀찮아 자리 펴고 침낭만 뒤집어쓰기 일쑤였지만, 각시가 동행할 때는 텐트도 치고 담요와 베개까지 준비를 했는데, 몇 해 전부터 각시가 이제는 야영은 싫다고 하신다.

 

그래도 지리산 종주 길의 첫날에 성삼재 버스정류장에서 내려 노고단산장까지 걸어가면서 하늘 좀 보고 가자고 몇 번을 쉬면서 바라보았던 밤하늘 얘기는 지금도 종종 하신다. 그렇게 아름다운 밤하늘은 그때가 최고였다고...

 

그것 뿐이었는가!

다음 날 새벽에 노고단 정상에서 바라본 섬진강의 운해는 우리를 천상의 세계로 데려다주었지 않았는가!

 

 

 

 

 

 

 

홍화문이 이 호텔의 출입문이다.

 

물고기에게 밥 주느라고 이 주변인 재인폭포의 물줄기가 한탄강과 만나는 곳, 신답리 고분 아래, 영평천이 한탄강과 만나는 지점의 베개용암이 있는 아우라지 그리고 조금 아래에 있는 좌상바위에서 지새운 밤들이 수없이 많아서 해프닝도 많았고 추억도 많은 곳이다.

 

 

 

 

 

 

 

주차장에서 바라보는 호텔의 모습이다.

누가 이 외진 곳에 있는 호텔을 얼마나 이용할까? 생각했지만 개인 또는 가족 단위의 이용객도 있을뿐더러 의외로 회사나 각종 모임의 행사장으로 많이 이용하는 것 같다.

 

 

 

 

 

 

 

Cabana, Cabin과 비슷한 것인데, 지나다니면서도 이건 본 기억이 없는데 호텔의 홈피에 들어가 보니 이런 것도 있는데, 카바나만 별도로 이용하는 건지 호텔과 패키지로 이용하는지 설명은 없다.

 

 

 

 

 

 

 

“왕가“ 운운하다 보니 뜬금없이 ”초요갱(초요경 楚腰輕)이 떠올랐다.

 

왜냐하면 초요갱이라는 여자가 세종(世宗, 1397∼1450)의 아들 중 평원대군과 화의군 그리고 계양군 등 세 왕자와 정을 통하는 등 세조(世祖, 1417∼1468) 때까지 수많은 염문으로 조정을 시끄럽게 하여 그로 인해 여러 사람이 죽어 나갔으며 조선왕조실록에 무려 16번이나 거론되는 특별한 인물이기 때문이다.

 

초요갱의 출신성분은 확인되지 않고, 초나라의 미인을 닮았다 하여 ”초요갱“이라 했다는데, 박연(朴堧, 1378∼1458)의 수제자로 궁중음악의 유일한 전승자여서 궁궐 생활을 하게 되었다는데, 황진이와 어우동 등과는 결이 조금 다른 여인이었던 모양이다.

 

어쨌든 화의군은 그 끼를 절제하지 못해 세조로부터 사약을 받았는데, 화의군이 그런 것은 그가 서자였던 울분을 그렇게 표출했던 건 아닐까 싶고, 그러든 저러든 이복형제에게 사약을 내리는 왕도 참 고달픈 직책이었던 것 같다.

화의군은 북한산 둘레길 "구름 정원길"의 "진관생태다리" 옆에 잠들어 있다.

 

 

 

 

 

 

조선조 최고의 파격적인 스캔들의 주인공 “어우동(於宇同, ?~1480)” 또한 빠질 수 없잖은가?

 

양반가에서 태어나 왕족인 태강수 이동과 결혼하였으나 음탕(?)하다고 버림을 받아 왕족에서부터 노비에 이르기까지 통정을 하며 파란만장하게 살다 보니 세상이 시끄러웠고, 이에 치죄를 하다 보니 남자들은 모두 빠져나가고 어우동만 사사(賜死)당했다고 한다.

 

여자는 혼전에는 아버지의 소유이고 결혼하면 남편의 소유였던 시절이었으니 음탕하다는 이유도 이동의 일방적인 주장이었을 것 같고, 버림받은 어우동은 남존여비에 저항하는 생각으로 그렇게 살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도 들고, 일반 형벌이 아니라 사사를 당하는 판에 그 가련한 여자의 목숨 하나 건져주는 남자가 없었다니 못난 놈들이 사는 세상이었던가 보다.

 

권장되는 사랑과 금지된 사랑 사이에서 훔쳐먹는 사과가 더 맛있는 게 인간의 심리인 것 같은데 그건 남의 떡이 커 보이기 때문일 테고, 훔치려거든 그에 따른 책임을 각오해야 할 것이고 그렇지 않으면 내가 감당할 수 있는 범위 내에서 머물러야 하는데, 사랑은 럭비공 같은 것이어서 언제 어디로 튈지 모르는 거 같다.

 

그렇더라도 내가 힘들지언정 상대방은 지켜주어야 도리 아닐까?

그럴 각오와 자신 그리고 능력도 안 되면 자격이 없는 거 아닌가!

그것도 남존여비의 세상에서....

 

 

 

 

“황진이(黃眞伊, 1506~1567)”가 명기(名妓)라고는 하지만, 한양도 아니고 개성이라는 지방의 일개 기생이 지금까지도 인구에 회자될 뿐만 아니라 백호 임제 선생으로부터 헌시까지 받았으니 가장 행복한 사람이었던 것 같다.

황진이가 황진이인 것은 많은 재능을 갖추고 있었기 때문이기도 했겠지만, “동짓달 기나긴 밤을 한 허리를 베어내어”라는 그야말로 창의적인 생각을 떠올리고 표현해내는 천재성에도 있을 것 같다.

 

예쁜 사람, 아름다움의 유효기간이 얼마나 될까?

3년쯤 될까? 아름답기만 할 뿐 재능이 별로인 사람과 인물은 조금 못해도 재능이 뛰어난 사람 간에 누가 더 매력 있는 사람일까? 그런 면에서 보면 황진이는 용모와 가무는 물론 시서화에 뛰어난 재능으로 뭇 남성들의 팜므 파탈이었던 것 같다.

 

그뿐만 아니라 내가 아는 한 조선 최초로 계약 동거를 한 여인인데, 황진이가 남자를 선택해서 자기 돈으로 동거를 했다니 이재관리도 잘했고 자존심이 보통 빵빵한 게 아니었다는 얘기렸다.

 

내가 나쁜 책을 읽었는지 모르겠지만, 그런 얘기도 있잖은가.

이발을 하면 3일 동안 기분이 좋고, 예쁜 사람을 배우자로 맞으면 3년이 행복하고, 똑똑한 사람을 배우자로 맞으면 30년이 행복하다지만, 현명한 사람을 배우자로 맞으면 3대가 행복하다고 하는데, 진리에 대한 인문학의 정의와 관계없이 현명한 사람은 상황에 따른 최선의 답을 찾아내는 사람일까?

 

 

 

 

그런 얘기를 한 적이 있었다.

우리 행복한 줄 알고나 살자고.

좋은 시절에 태어나서 그나마 이만큼이나 행복하다는 거 말이다.

 

특히 여자는 더 그렇다.

나혜석(羅蕙錫, 1896∼1946)의 “이혼고백서(1934년)”가 그리 오래전의 얘기가 아니고 윤심덕과 전혜린이 재능이 모자랐던 게 아니었잖은가. 편견일지 모르겠지만, 여자가 여자라는 코르셋을 벗어던진 게 바로 얼마 전의 얘기니까.....

 

조선왕가에서 삼천포로 빠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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