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구려의 기마병상
충주에서 제천으로 가는 길에 있는 "천등산휴게소"에 있는 조각인데
고구려 하면 연상되는 기마민족의 모습을 연출한 모양이다.
사람은 물론이고 말까지 철갑(鐵甲)으로 무장하여 방어에는 좋겠지만
너무 무겁고 둔해서 기동력이 있었을지 의문이다.
천등산(天登山)은 인근에 있는 지등산(地登山), 인등산(人登山)과 함께 천지인(天地人) 삼재(三才)를 이룬다는 말이 있으며
“천등산 박달재를 울고 넘는 우리 님아”로 시작되는 “울고 넘는 박달재”라는 노래에 나오는 박달재는 제천 봉양읍과 백운면을 가르는 구학산과 시랑산이 맞닿은 고갯길이라 하며, 천등산에 있는 재는 “다릿재”라고 한다.
기마병의 얼굴 표정이 보는 각도에 따라 달라 보인다.
왜 그랬는지 모르겠지만...
매번 다음에 다음에 하면서 지나쳐다니기만 했던 소수서원을 작심하고 찾아보았다.
소수서원(紹修書院) 강학당(講學堂) 백운동(白雲洞)
사적 제55호인 소수서원은 건립기록은 확실치 않지만, 풍기군수 주세붕((周世鵬. 1495∼1554)이 이곳 출신의 유학자인 안향(安珦. 1243∼1306)을 배향하는 사묘(祠廟)를 1542년에 설립했다가 1543년(중종 38)에 유생교육을 겸비한 백운동서원(白雲洞書院)을 설립한 것이 우리나라 서원의 시초라고 알려져 있으며, 퇴계 이황(退溪 李滉. 1501∼1570)의 요청에 따라 1550년(명종 5년)에 “소수서원(紹修書院)”이라는 사액(현판)을 최초로 하사받았다고 하니 최초의 국가공인서원이 된 것이다.
나는 관람을 뒷문에서부터 정문쪽으로 거꾸로 했지만
나레이션은 정문에서부터 시작한다.
지도문(志道門)
소수서원의 출입 정문이며, 지도문 오른쪽에는 경렴정이 있고 그 옆에는 수령이 약 500년이라는 울창한 은행나무 보호수가 있다.
경렴정(景濂亭)
백운동(白雲洞)
강학공간은 강학당(講學堂)인 백운동(白雲洞), 지락재(至樂齋), 학구재(學求齎), 일신재(日新齋), 직방재(直方齎) 그리고 장서각(藏書閣)으로 구성되어 있다.
백운동(白雲洞)이라는 현판이 정면에 붙어있지 않고 측면에 붙어있는 것은 왕이 하사한 소수서원(紹修書院)이라는 현판을 정면에 붙여야 했기 때문으로 짐작되는데, 그 사액현판은 지금 소수박물관에 보관되어 있을 뿐만 아니라, 건물 정면에는 이 사액현판을 붙일 자리도 마땅치 않은 것을 보면 건물을 복원 또는 보수할 당시 충분한 고려가 없었던 듯하다.
지락재(至樂齋)
학구재(學求齋)
일신재(日新齋)
직방재(直方齎)
장서각(藏書閣)
한마디로 대단한 규모의 서원이었다.
시계바늘을 약 1600년 전으로 돌려서 생각해 보면 더욱 그렇다.
훌륭한 스승들에, 큰 규모의 시설이었으니 유생들이 많이 모여들었고 그래서 많은 인재들이 양성되어 배출되었을 것이다.
문성공 묘 등
조선 성리학의 시조인 문성공(文成公) 회헌(晦軒) 안향(安珦. 1243∼1306)의 사묘(祠廟)를 1542년에 주세붕이 세웠다고 한다.
사료관(史料館)
부석사에 다니던 길 그리고 또 다른 길에도 이 소수서원을 많이 지나다녔었는데, 왜 여지껏 소수서원을 한번도 들러보지 않았는지 모르겠다.
세상을 모두 다 돌아보고 살 수야 없겠지만 그래도 그 유명한 소수서원을 이제서야 돌아보니 우습기도 하다.
소수서원은 조선 사회에 많은 인재들을 배출했던 명문서원임에 틀림없지만, 서원도 처음에는 성리학에 기초한 학문과 미풍양속 등을 명분으로 내세웠지만, 학맥과 인맥이 형성되고 특권이 형성되는 등 명과 암이 있었는데, 사실 지금의 학교교육 역시 오십보백보 아닐까 생각된다.
고직사(庫直舍)
서원의 살림살이를 맡아보았던 집사(執事)가 거주했던 집
뒷문
뒷문을 나오면 담장이 쳐진 서원 밨으로 나오게 되며, 죽계천 옆에 펼쳐진 유적들을 돌아볼 수 있다.
죽계별곡(竹溪別曲)
고려 충숙왕 때 안축(安軸: 1287~1348)이 지은 5장으로 구성된 경기체가로, 당시 선비들의 생활상과 생각을 노래했다고 한다.
탁청지(濯淸池)
바로 옆에 시원스런 죽계천이 흐르고 있는데, 서원 경내도 아니고 냇물 바로 옆에다 연못을 만든 것은 뭔가 균형이 깨진 느낌이었다.
백운교
건너편에 있는 경자암과 취한대로 죽계천을 건너가는 다리
경자암(敬字岩)
빨간색으로 쓰여진 "경" 자는 주세붕이 백운동서원을 세우면서 쓴 글씨라 하고, 백운동이라는 글씨는 퇴계 이황이 새긴 글씨라 한다.
비가 오고 물이 불어서 물색이 탁하고 경자암이 물에 많이 잠겨버렸다.
취한대(翠寒臺)
죽계천을 사이에 두고 서원 건너편 산자락 밑의 냇가에 있는 누대이니 위치로만 보아서는 시 연회 같은 음주가무 등이 연상되지만 "취(翠)" 자가 "물총새 취" 자여서 아리송 하다.
광풍정
죽계천(竹溪川)
장마철이어서 비가 오락가락하고 냇물이 탁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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