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기, 충청

김포향교

아미고 Amigo 2023. 7. 18. 21:54

(사진은 클릭하면 커집니다.)

 

김포향교(金浦鄕校) 전경

김포성당을 가보면서 김포향교를 가보지 않는다는 것은 조상에 대한 예의가 아니라 생각되어 둘러보았다. 그러나 한편 생각해보면 공자는 중국인으로 우리의 조상도 아닐뿐더러 세상을 주유하며 많은 가르침과 어록을 남겼다고 하지만 집에서는 공처가였고 관직에 올라서도 별로 성공적이지 못했던 분인데 우리나라에서는 유난스럽게 성현을 넘어 신격화 수준에 이르렀던 것을 보면 우스꽝스럽기도 하다.

 

하기야 천도교(天道敎)와 민간신앙을 제외한 종교는 모두 외래종교인데도 개화기까지 이미 뿌리를 단단히 내렸으니 참으로 아이러니하다. 물론 불교와 유교는 시대에 따른 통치이념이었으며 이로 인해 학문이 부흥되었기에 충분히 이해가 되지만, 인과의 법칙과 실사구시에 기반한 과학적 교육관이 지배하는 세상에서도 논리로 입증할 수 없는 교리체계의 종교가 활개를 치는 걸 보면 인간이 참으로 난해한 동물이라는 말이 떠오른다.

 

한편 우리나라 최초의 향교는 1127(고려 인종 5)에 세워진 강화도의 교동향교(내 블로그 교동향교참조)로 알려져 있는데, 김포향교도 같은 해에 세워진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그런데 고려 시대에 이미 지방에 향학(鄕學) 이라는 국립교육기관을 세웠으며 향교와 유사한 기능을 하였던 것으로 보아 향학이 향교의 시초 또는 전신(前身)이었을 가능성이 커 보인다.

 

 

 

 

 

김포향교의 배치도

향교에서는 군사부일체(君師父一體)와 장유유서(長幼有序) 등의 유학을 가르쳤는데, 욕망을 창의적으로 발산하고 발현하는 것이 아니라 절제해야 하는 것으로 가르쳤는데, 불교 역시 업보(業報)와 해탈(解脫)을 강조하여 개인의 창의와 도전이라는 측면에서는 매우 소극적인 맥락이었던 것 같다.

 

이에 반해 백인 사회에서는 르네상스와 종교개혁 그리고 산업혁명을 거치면서 개인의 자유와 평등을 주장하고 그것이 관철되어나가면서 수많은 창의가 발현되어 원자재의 확보와 시장개척의 필요에 따른 화약과 총포의 획기적 발전으로 세계를 제패했다는 것이 일반적인 얘기인데, 유럽이 중세의 암흑에 갇혀있을 때 찬란한 문물을 꽃피웠던 한국과 중국이 근대의 시작과 함께 몰락했던 것은 실용이 아닌 명분에 중심을 둔 교육제도에 근본적인 문제가 많았던 것으로 생각된다.

 

 

 

 

 

명륜당(明倫堂)과 동재(東齋) 서재(西齋)

우리나라와 중국의 건물은 배산임수(背山臨水)에 남향(南向)이 기본이었으니 명륜당을 바라볼 때 오른쪽이 동재이고 왼쪽이 서재인데, 동재에는 상급생들이 그리고 서재에는 하급생들이 기숙하였다 하고, 향교에 입학하면 군역(軍役)이 면제되었다 하니 이거 굉장한 매력이자 욕망의 각축장이 되었을 법하다.

 

군역을 면제받으려 향교에 들어가기 위해 별의별 방법들이 다 동원되었을 것이고 또 중앙정치무대에 진출할 수 있는 성균관에 들어가기 위해 얼마나 치열한 경쟁을 했을까를 생각해보면 그때나 지금이나 세상은 오십보백보인 것 같다.

 

 

 

 

대성전 전경(大成殿 全景)

계단을 올라가면 나오는 문이 내삼문(內三門)인데, 명륜당 권역으로 들어갈 때도 계단을 올라 외삼문(外三門)을 통해 들어간다. 이렇듯 속세에서 명륜당이 있는 선비의 공간으로 들어가는 것과 선비의 공간에서 대성전이 있는 현인들의 공간으로 가는 길은 지형의 높낮이와 대문 그리고 담장을 통해 공간의 의미와 품격을 다르게 표현한 것으로 생각된다.

 

 

 

 

 

대성전(大成殿) 과 동무(東廡) 서무(西廡)

대성전은 공자(孔子)의 위패(位牌)를 모신 사당(祠堂)으로 매월 음력 보름날에 향교의 책임자인 전교(典校)의 주관하에 제향의례(祭享儀禮)를 올리며, 동무와 서무는 대성전에 모시지 못한 유현(儒賢, 東國十八賢 또는 韓國十八賢)의 위패를 모신 건물이다.

 

 

 

 

 

느티나무

김포향교도 대략 1,000년 가까운 역사를 가진 향교로 300년이 넘은 이 느티나무는 대성전으로 올라가는 계단 왼쪽에 서있으며, 유학강론을 하던 옛날에 유생들이 북적대던 모습과 교육기능이 사라지고 제향의례만 하고 있는 지금 그리고 한자(漢字)가 거의 사라지는 다음 세대에서 일어날 변화까지 모두 보게 될 것 같다. 또한 향교 앞에 있는 꼬막껍데기 같은 집들은 김포향교 소유로 임대를 하고 있다는데 이것들의 변화 또한 지켜볼 것이다.

 

BlogTistory로 바뀌면서 많은 변화가 일어나는 것 같다.

좋은 블로거들이 많이 은퇴를 하신 것 같고 새로운 블로거들이 들어오는데 문화의 이질감이 확연하게 느껴진다. 또한 이게 블로그인지 광고판인지 머리가 산란스럽기도 하다. 나도 하던 일을 마무리하면 은퇴해야 하지 않겠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