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 주변

운현궁의 봄

아미고 Amigo 2023. 5. 6. 23:04

(사진은 클릭하면 커집니다.)

 

운현궁(雲峴宮) - 사적 제257

운현궁 이거 참 재미있는 궁이다.

우선 궁궐(宮闕)()과 궐()”을 합해서 궁궐이라는데, 궁은 전(殿), (), (), (), (), (), (), ()으로 구성되고 궐은 경복궁의 동십자각(東十字閣)처럼 궁 밖 좌우에 있는 일종의 망루라고 한다니 우리나라의 궁궐은 경복궁(景福宮)”밖에 없으며 나머지는 모두 궁인 것 같다. 서촌 쪽에 있었던 서십자각(西十字閣)은 도시개발로 사라졌다고 한다.

 

그런데 재미있는 것은 다른 궁들은 위에서 말한 전각(殿閣) 등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운현궁만이 유일하게 당()으로만 구성되어 있는데 바로 여기에 흥미진진한 많은 이야기들이 숨어있는데 그 긴 이야기들은 너무 길어서 생략하고 운현궁은 원래 운현(雲峴)고개 아래에 있는 운현재(雲峴齋?, 구름재에 있는 집)로 대원군의 사저(私邸)여서 전각이 아니라 당인 것이고, 고종이 여기서 태어나고 왕이 되었기에 궁으로 격상된 것이라 한다.

 

운현궁의 건축에 관하여는 1864924(고종1)승정원일기에 운현궁 준공에 따른 낙성식 기록이 나온다는데 아마도 기존 건물을 증개축한 것으로 보인다.

 

 

 

 

 

 

 

운현궁의 봄

봄이 왔는데, 운현궁의 봄이 궁금해서 이번 봄에도 길을 나서 둘러보았다. 매번 둘러보아도 특별할 것은 없지만 이렇게 둘러보며 흥선대원군과 고종의 흥망성쇠와 고단했을 삶을 그리고 내 삶도 생각해 본다.

 

대문을 들어서면 궁이라고 거창하게 수직사(守直舍)와 관리사무실이라고 되어 있지만 사저이던 시절에는 행랑채와 광이었을 것이다.

 

 

 

 

 

 

 

노안당(老安堂)

조선시대 양반가의 사랑채에 해당하는 건물로 노년을 편안하게 보낼 집이라는 의미일 텐데 생각처럼 그렇게 보내지는 못했던 것 같고, 조선왕조 5백여 년과 근.현대사에 흥선대원군만큼 권력을 향한 집념이 강했던 사람이 있을까싶고 망해가는 왕조시대의 끄트머리에서 파란만장한 삶을 살았던 것 같다. 그래서 김동리 선생도 집념의 화신” “눈물의 세월이라는 표현을 했던 것일까...

 

 

 

 

 

 

 

노락당(老樂堂)

운현궁의 중심 건물인 안채에 해당하는 건물로 노년을 즐겁게 보낼 집이니 노안당과 비슷한데 당호는 논어에서 따온 것이라 하며 이중처마로 멋을 한껏 낸 건물로 근래에는 전통혼례식과 회갑연 등을 이곳에서 연다.

 

흥선대원군(이하응, 18201898)의 아버지인 남연군(이종)을 연천에 장사지냈다가 명당을 찾아 절을 불태워가며 가야산으로 이장한 배경과 이야기들 그리고 대원군이 자신의 야망을 가슴속 깊은 곳에 숨긴 채 안동 김씨 세력들과 어울리며 파락호(破落戶) 생활을 해가며 왕의 먼 친척(25대 왕 철종과 9촌인데 실제 혈통으로는 17촌이라 한다.)에 불과했던 고종(高宗, 18521919, 재위 18631919)을 적장자인 이재면(당시 19)을 제치고 11살의 나이에 조선의 제26대 왕으로 등극시키고 대한제국의 초대황제로 만드는 등 자신의 권력의지를 관철했고 며느리인 명성황후와 권력을 두고 밀당했던 이야기 등은 내겐 너무 과중할 뿐만 아니라 장편소설 분량이어서 생략한다.

 

 

 

 

 

 

 

이로당(二老堂)

조선시대 양반가의 전형적인 건축에서는 없는 별도의 별당인 셈인데 대원군의 부인인 부대부인(府大夫人) 민씨가 거처하던 곳으로 출입구가 없는 자 형태의 건물로 노락당에서 복도를 통해 출입할 수 있는 은밀한 공간이어서 두 노인이 노년을 보낼 곳으로 생각했던 것 같다. 세 건물의 당호에 모두다 노() 자가 들어가 있는 걸 보면 대원군이 늘그막을 많이 생각했던 모양이다.

 

 

 

 

 

 

 

노락당과 이로당의 뒤꼍 모습

노락당과 이로당을 연결하는 복도 밖으로 나가면 노안당, 노락당 그리고 이로당의 뒷모습을 볼 수 있다.

 

 

 

 

 

 

 

유물전시관

 

 

 

 

 

 

양관(洋館)

서양식 건물이어서 양관이라고 한 것 같으며 원래 아재당과 정자인 영화루, 그리고 은신군과 남연군의 사당이 있던 자리에 1907년에 일제가 한일합병에 앞서 황실 인사를 적극적으로 회유하기 위해 만들어 주었다고 하며 현재는 덕성여대가 소유하고 있다.

 

 

 

 

 

 

 

 

조선의 3대 파락호(破落戶)

파락호 얘기가 나왔으니, 사전에서는 파락호(破落戶)란 재산이나 권력이 있는 집안의 자손으로서 집안의 재산을 몽땅 털어먹는 난봉꾼을 말한다고 하는데, 조선의 3대 파락호로 대원군과 김용환(18871946, 건국훈장 애족장) 그리고 김남수(18991945, 건국훈장 애족장)를 든다고 한다.

 

대원군은 정권을 잡기 위해서 파락호를 자처했고 김용환과 김남수는 독립운동을 하기 위해 파락호를 자처했다니 결이 다르고 두 분의 독립유공자에게는 훈장이 추서되었다고 한다.

 

운현궁의 봄 보자고 나섰던 길이 창덕궁과 창경궁 그리고 창덕궁후원까지 이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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